2014년 4월16일. 그 날 이후로 시간이 멈춘 듯합니다.

안녕들 하셨습니까? 아니요. 안녕하지 못합니다. 2014년 4월16일은 잊어서는 안 되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예기치 못한 순간에 터지는 눈물에 당황하고 때론 악몽을 꾸다 벌떡 일어나곤 합니다. 이 원고를 쓰면서도 한 줄 써놓고 멍하니 정신줄 놓고 있다는 걸 깨닫고 지우고 또 쓰고 또 정신줄 놓고…….

유가족들은 온전한 위로조차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작던 크던 모든 상처의 치유는 피해를 일으킨 당사자의 진정한 사과에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건에 대한 명명백백한 진실 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있을 때 비로소 아물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사과와 위로를 받아도 아물까 말까한 상처를 오히려 더 후벼 파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다시 복기하고 싶지 않을 만큼 참담한 말들이 유가족과 추모하는 사람들에게 쏟아졌습니다.

누구를 위한 누구의 나라입니까? 우리는 도대체 어떤 나라를 만들어 놓은 걸까요?

구호로서 퇴진이라면 아니 외친만 못하다는 게 지금도 갖고 있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지금, 매우 진지하게 박근혜 대통령을 퇴진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그리고 박근혜 까지. 어떤 대통령도 나를 국민으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나는 그들을 대통령으로 인정해왔습니다. 왜? 빨갱이니, 종북이니, 불순분자니 하는 딱지를 붙이며 ‘순수’한 국민이 아니라고 국민으로서의 나를 부정한 저들을 왜 인정해 왔을까요?

▲ 5월10일 안산 문화광장 촛불 집회에 많은 수의 안산지역 고등학생들이 참가했다. 한 고등학생이 행동을 촉구하는 촛불을 들고 있다. 김형석

그들은 노란 선 안에 머물며 구호만 외치는 내가 우스워보였을 거 같습니다. 정리해고로 공장 밖으로 쫓겨나도 크레인 위로, 광고탑 위로, 송전탑 위로 올라가 싸우는 당신이 우스워보였을 거 같습니다. 우리가 우습고 한심해보이지 않다면 일 년에 십 수 명의 노동자가 죽어나가도 사과 한마디 안하는 ‘안전무시’ 현대중공업 최대주주를 서울시장 후보로 내세우지는 않았겠지요. 저 후안무치한 결정을 할 만큼, 나도 당신도 지나치게 참았고 지나치게 용납해 왔나 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래도 나는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싸웠다는 생각이 들어설 자리는 없습니다. 세월호 사고는 자본과 권력의 물신주의 의한 사고이기도 하지만 나와 당신의 책임이기도 한 건 아닐까요?

“누구나 다 정치인들에 대해 불평하잖아. 모두가 정치인들이 구리다고 말하지. 그런데 사람들은 말이야, 도대체 정치인이 어디서 온다고 생각하는 거야? 걔네가 하늘에서 떨어지지는 않았잖아. 걔들도 다 미국인 부모 아래서, 미국 가정에서, 미국 집에서, 미국 학교에서, 미국 교회에서, 미국 사회에서, 미국 대학에서 자란 자들이야. 게다가 미국인들이 뽑았거든?

겨우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 쓸 만한 것을 골라 놓은 게 그거라고. 바로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만들어 낸 것들이야. 쓰레기를 넣어봤자, 쓰레기 밖에 더 나오나? 이기적이고 무관심한 국민에게는 이기적이고 무관심한 지도자 밖에는 없는 거야.

임기 같은 것을 제한해 봤자 소용없어. 어차피 한 무더기의 새로운 이기적이고 무관심한 새로운 미국 놈이 다시 그 자리에 들어설 뿐이야. 그러니까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구린 건 정치인이 아닐지도 몰라. 어쩌면 구린 건 따로 있을지도 몰라. 이를테면 대중들. 그래, 대중들이 구린 거야.

이성적이고 양심적이고 똑똑한 사람들은 전부 다 어디 갔다는 거야? 이 문제를 풀고 우리를 이끌 그런 미국인들은 다 어디로 간 거냐고. 우리한텐 그런 사람 없어. 이 나라에는 말이야. 사람들은 모두 대형마트에 가서 똥꼬나 긁으면서 코나 파고 허리에 두른 가방에서 신용카드 꺼내서 반짝반짝 빛나는 야광 운동화나 사고 있다고.

투표한 사람들은 정치인들에 대해 불평할 권리가 없어. 니들이 투표해서 리더를 뽑았는데, 걔네들이 무능하고 거짓말쟁이라서 권력 잡고 나라 망치면 니들이 걔네 행동에 책임을 져야지. 니들이 문제의 원인이잖아.”

미국의 유명한 코미디언 조지 칼린의 스탠딩 코미디 중 한 장면입니다. 이렇게 신랄하게 비판한 그는 ‘그래서 나는 투표하지 않는다. 고로 나는 책임질 어떤 것도 없다’라고 말을 맺습니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투표하지 않는다는 게 무언의 항의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입니다.

우리가 지금 가만히 있는다면 조지 칼린의 말처럼 우리는 '구린' 대중이 될 겁니다. 더 이상 구린 대중으로 남아있고 싶지 않습니다. 현 대통령을 퇴진시킨 후 선출된 다른 대통령도 별다르지 않을지 모릅니다. 눈치라도 보는 덜 구린 대통령, 자본과 권력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끝까지 잊지 않아야 하고 끝까지 싸워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며칠 전,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진’이라고 소개한 한 장의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왔습니다. 별로 특별한 것도 없는 사진이었습니다. 10대 남학생들이 환하게 웃고 있는 단체 사진이었습니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나무 아래에서. 단원고의 어느 반의 단체 사진이었습니다. 그들 중 단 두 명만이 지금 이 세상에 살아있다고 있답니다.

이 아이들은 더 이상 벚꽃나무 아래에서 포즈를 잡기 위해 티격태격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공부하라는 부모의 성화를 들으며 짜증내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며 두근거리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에 조바심내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이제 더 이상 늙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세상은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지켜주지 못했으므로……

이 아이들이 잃어버린 삶은 그다지 찬란하지도 달콤하지도 않은 삶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때론 불안하고 때론 지루한, 그런 무덤덤한 평범한 삶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설령 이들의 미래가 비루할 게 분명하다고 하더라도, 오롯이 살아냈어야 할 삶이었습니다. 사라지면 안 되는 세상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세상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지켜주지 못했으니 이제라도 우리는 끝까지 잊지 않아야 하고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민정연 <희망의 노래 꽃다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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