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6일에 노동자들에 대한 손해배상과 가압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임 ‘손배가압류를 잡자! 손에 손을 잡고(이하 ‘손잡고’)가 정식 출범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조국 교수는 “파업으로 감옥에 가게 되면 몸으로 때울 수라도 있지만 손배가압류는 임금, 전세값 등 모든 걸 앗아간다는 점에서 장기적으로 위협이 되고 있다. 영국과 같은 경우는 불법파업을 벌였을지라도 손배가압류의 상한선이 정해져있지만 한국은 무한정 청구할 수 있어 사실상 노조활동 자체를 못하게 하고 있다”고 발언하면서 “‘손잡고’ 모임 자체는 거대한 투쟁을 만든다든가 재야단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손배가압류 문제만 한정해두고 정말 이 문제만큼은 바꾸자는 것”이라며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법률과 판례를 바꿔야 한다.”고 앞으로의 활동 방향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노동운동진영에서만 그 위험을 몸소 체험하며 노동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손배가압류 문제를 범시민적으로 확산시키고 법 자체를 바꾸고자 하는 ‘손잡고’의 출범은 대단히 환영할 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기쁘기만 했어야할 이 자리에서 저는 듣지 말아야 할 소리를 듣고 말았습니다. 손배가압류에 시달리고 있는 노동자들의 발언이 이어지고 있는 도중에 한 노조 관계자가 내빈들이 바쁘시니 조합원 발언을 축소하거나 순서를 바꿔 내빈 소개를 하자고 행사 진행자에게 얘기하는 소리를 듣고 아연실색했습니다.

손배가압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협조 받아야 할 곳이 많으니 관심 갖고 참석한 내빈들이 중요했을 겁니다. 저 역시 연대하러 온 내빈들에게 고마운 마음이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문제 당사자인 노동자들보다 우선 배려해야할 사람들은 아니지 않습니까? 2시간 가량의 행사 시간 전체를 다 참여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슬쩍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도중에 간다 해도 기사에 그들의 이름은 쓰여질텐데 순서를 바꿔서 그들을 소개하고 사진 찍는 일이 당사자들의 생생한 증언보다 중요한 일이었는지 되묻지않을 수 없습니다. 내빈들도 얼굴 도장 찍고 생색만 내러 참석한 게 아니라면 이해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정치를 모르는 사람의 순진한 생각인가요?

노동현장에 간혹 나타나는 유명인사들에 대한 인사치레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과한 경우가 많습니다. 노동조합이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존재는 조합원임에도 주객이 전도되는 이런 경우는 비일비재합니다. 노동운동이 점점 위축되고 힘들어지다보니 한 사람이라도 더 같이 하자는 생각 때문에 발생하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래에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례에 비하면 위의 사례는 매우 가벼운 실수 수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2007년 7월 철도공사 직접고용 투쟁 중인 KTX승무 조합원. 신동준

 

며칠 전에 매우 괴이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KTX승무원 400여명을 정리해고 했던 이철 전 사장과 김영훈 전 민주노총위원장이 철도민영화를 반대하는 동반1인시위를 한다는 기사였습니다. 그들은 복직 못했고 당시 100억대 손해배상액을 노조는 갚아야했다. 민영화 반대 시위하겠다는 이철 전 사장의 후안무치함은 별로 따지고 싶지 않습니다. 그가 노동자들에게 한 짓을 보며 남은 기대치가 전혀 없기 때문에. 그런데 그에게 시위하자고 손 내밀거나 혹은 그가 먼저 내민 손을 덥석 잡은 노조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철 전 사장이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는 말을 들은 적 없거니와 사과했더라도 함께 철도를 지켜내겠다고 1인시위에 나서기에는 그의 과오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는 1인 시위에 나서면 안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철 전 사장의 1인 시위 소식을 듣고 분이 가시기도 전에 더 괴이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현대자동차 노조가 노무현 재단에 1998년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 관련 영상 기록물을 기증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분노에 휩싸여 1998년 여름이 떠올랐습니다.

1998년 6월, 현대자동차 사측이 4830명 정리해고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7월에는 2678명의 노동자에게 정리해고를 통보했습니다. 조합원들은 고공농성을 시작했고 사측은 휴업으로 맞섰습니다. 이 과정에서 희망퇴직 회유가 있었고 신청하지 않은 노동자 1569명의 정리해고를 강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당시 노무현 국민회의 부총재가 당의 ‘노사정지원특별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중재를 자처하며 울산으로 향했습니다.

현대자동차를 방문한 그는 “여기에 정리해고 노동자들이 친 텐트가 100개가 넘는다고 하는데, 엄청난 숫자이지 않습니까? 이 사람들을 물리적으로 해결하려고 했을 때,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짐작가지 않습니까? 아직도 파업 노동자들 싹 밀어버리자고, 법질서를 얘기하는 분들도 있는데, 법질서는 정면도전하는 세력이 없는 법이 가장 합리적인 법입니다. 우리 사회의 노동법이 ‘나쁘다 옳다’를 떠나 우리 사회 현실이 법에 정면도전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치가 반드시 풀어가야지요. 모두가 법을 두려워하고 지켜야 한다는 명제에 대해서 동일할 때라야 법을 법으로써 강행할 수 있는 정당성, 힘이 생기는 것이지요. 정면으로 명분과 기치를 내걸고 한 사회의 중요한 의미 있는 세력을 가진 집단이 법질서에 저항할 때는 되도록 정치가 먼저 나서서 이 법을 수용해나가야 한다는 것으로 합의를 이끌어가야 한다. 그리고 끝내 그것이 안 될 때는 법을 수용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라면서 6일 간 협상을 중재했습니다. 그 결과 8월23일, 애초에 1569명을 정리해고 하려던 것을 사측이 철회하고 277명을 정리해고 하는 것으로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사태는 일단락되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그는 칭송받아 마땅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1998년 여름의 정리해고 사태에 대해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영이 어렵다며 5천 명에 가까운 노동자를 정리해고 하겠다던 사측은 애초 계획의 5% 가량만 정리해고 하는 협상안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주먹구구식으로 장사하는 구멍가게에서도 그런 식으로 경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277명도 정리해고 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걸로 이해됩니다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중재 덕분에 선방했다고 받아들여지는 건가요? 그래서 감사한 마음을 담아 영상을 전달한 건가요? 진짜 알고 싶습니다.

당시의 모습만 사실 그대로 담은 영상을 기증했을 뿐이라고 항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허나 부분적인 사실은 진실이 될 수 없습니다. 왜곡의 증거로 쓰일 뿐이지. 진실을 전달하려 했다면 그 영상에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 무엇을 했는지도 담겨 있어야 합니다.

“정면으로 명분과 기치를 내걸고 한 사회의 중요한 의미 있는 세력을 가진 집단이 법질서에 저항할 때는 되도록 정치가 먼저 나서서 이 법을 수용해나가야 한다는 것으로 합의를 이끌어가야 한다. 그리고 끝내 그것이 안 될 때는 법을 수용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던 그는 불과 몇 년 후에 대통령이 된지 4개월 만에 철도 파업에 공권력을 투입했습니다. 그리고 ‘노동귀족’이라며 대기업 노동자를 비롯한 노동운동을 공격했고 철저히 사측에게 유리한 ‘노사관계 로드맵’을 발표했습니다. 그가 빼든 손배가압류의 칼날에 여러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습니다.

노무현 재단에 과연 노동자들의 죽음의 기록이 있을지 궁금합니다. 노동자들에게 1998년 여름이 무탈한 여름, 난관을 슬기롭게 극복했던 여름이었던 겁니까? 현대자동차 노조는 무슨 의미로 자료를 기증한 겁니까? 알고 싶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잡을 손이 있고 뿌리칠 손이 있습니다. 연대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검증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책임 있는 자리에 있던 사람이 입장이 바뀌었다면 명백히 자신의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고 난 다음에야 새로운 길을 함께 갈 수 있는 겁니다. 반면교사 없는 역사는 한사코 나아가지 못할 겁니다. 용서하지 못할, 기억해야할 역사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민정연 <희망의 노래 꽃다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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