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카는 커서 뭐가 되고 싶은가?”
“담뱃가게 주인이요?”

거창한 직업이 아니라 담뱃가게 주인이 되고 싶다는 조카의 특이한 소원에 대화를 듣고 있던 부모님과 올케가 참견했습니다. “고작 담뱃가게 주인이 뭐냐? 대통령이나 장군, 판검사까지는 아니어도 그건 아니지”로 시작하여 조카의 소원에 다들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소박한 조카의 꿈에 내심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우와~ 뭔가 근사한데, 왜 담뱃가게 주인이 되고 싶어?”
“돈을 많이 벌잖아요”라는 대답에 순간 분위기는 반전되었습니다. 전 울상이 되었고 식구들은 돈을 잘 벌 수 있는 다른 직업을 추천하고……. 아마도 나의 어머니이자 조카의 할머니께서 하시던 작은 식당에서 담배를 팔았는데 조카의 눈에는 그게 상당히 많은 돈을 버는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조카가 다섯 살 때 이야기입니다.

고등학생이 된 지난해. 조카의 성적에 울상이 된 올케가 저에게 부탁을 해왔습니다. “형님, 첫째가 공부를 너무 하지 않아요. 공부 좀 하라고 격려해주세요”라고……. 저는 십 수 년 전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 큰 조카는 뭐가 되고 싶나?” 그 사이에 조카의 소원은 거창하게도 펀드매니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다섯 살 때나 열일곱 살이 되어서나 ‘돈을 번다’는 소원에서 벗어나지 않는 걸 보고 심통이 난 저는 작정하고 조카에게 삐딱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펀드매니저는 공부를 매우 많이 해야 하는데 우리 조카는 공부하는 것 싫어한다면서?” 저의 도발에 조카는 기가 죽어 아무 말도 하지 않더군요. “그런데 공부는 하지 않아도 돼”라고 하자 옆에 있던 올케가 사색이 되어 저를 말리기 시작했습니다. 고모와 조카의 대화를 방해하지 말라며 올케를 내보내고 조카와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화두는 ‘꿈’이었습니다.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꿈을 스스로 갖고 있지 않으면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에서 간섭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도 했습니다. “주변의 눈치를 보며 대략 그들의 요구에 맞추어 사는 삶이 과연 재미있을까?”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행복해지는 것일 텐데 행복하기 위해서는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잘 알고 있어야 하고 지향해야만 한다”는 말도 했습니다. 그제야 조카는 자신이 그런 꿈이 없다고 실토하며 대한민국 땅에서 십 대로 사는 삶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니다. 자신이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부모님이 자신의 삶을 정해놓으셨고 딱히 자신의 꿈이 없으니 시키는 대로 해야 할 것 같다고 고백했습니다.

누가 저에게 네 인생의 어느 시기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물어본다면 십대 시절이라고 서슴없이 말할 겁니다. 왜 그때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물어본다면 “신나게 놀고 싶어서”라고 대답할 겁니다. 대학학보사 친구들과 인터뷰를 하다가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십대 때 놀지 못한 것을 가장 후회한다고……. 제가 놀아야 할 나이인 십대 때 제대로 놀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일찍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을 일찍 선택했고 더 잘해낼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회한이 남기 때문입니다.

제가 책임져야 할 자녀가 없는지라 자녀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 쉽지 않음에도 조카를 빗대어 이야기를 시작한 계기는 아마도 한 달 전에 만난 조선학교 학생들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한 달 전에 만났던 조선학교 학생들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꽃다지는 1996년부터 지금까지 수차례 일본에서 일본의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공연을 했습니다. 이번 공연은 이전과는 다른 자리였습니다. 요코하마에 있는 조선학교 공연이었습니다. 이미 정해진 일정상 일본 공연은 무리였지만 공연을 강행했던 이유는 요코하마가 조선학교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중단했기 때문에 응원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1980년대부터 지급해오던 학교 보조금을 끊은 이유는 북한의 핵 개발과 미사일 실험 때문이었습니다. 조선학교 관계자는 “학교는 북한의 대변인이 아니다. 현의 보조금이 없어져 재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라며 방침을 바꿀 것을 촉구하고 있으나 요코하마 교육 당국은 묵묵부답이라고 합니다.

처한 상황이 엄중한지라 <꽃다지>도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학교를 방문했습니다. 뜻밖에 학교 교원들과 학생들은 생기 넘쳤고 발랄했습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교육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방과 후 예체능 특별활동을 하고 모든 학생이 하고 있었습니다. 예체능교육은 삶의 자양분을 만든다는 면에서 입시에 지친 한국 땅의 청소년들을 생각하니 부러웠습니다.

그보다 더 제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인사성 바른 학생들의 모습이었습니다. 한국의 청소년들은 대부분 학교에 누가 방문하던 모른 체하고 지나치기 일쑤입니다. 한국의 청소년들이 유난히 버릇없는 태생이어서가 아니라는 사실은 저보다 자녀를 가진 분들이 더 잘 아실 겁니다. 교육의 문제이고 무너진 공동체의 문제이지요. 학과공부만 잘하면 만사형통이라는 식으로 교육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되더군요. 무조건 공부만 잘하면 인생 전부가 해결될 것처럼 가르치는 작금의 세태가 함께 살아가야 할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이해의 시선을 한국 땅의 청소년들로 하여금 배우고 익힐 기회를 박탈한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고 한국 땅의 현실이 비관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저는 제가 작년에 지역활동을 하면서 만난 지역의 ‘아줌마’들로부터 새롭게 싹트고 있는 희망을 봅니다. 구로구 오류동에 ‘두리앎’이라는 아줌마들. 엄밀히 말하자면 엄마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공동육아의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엄마들이 머리 맞대고 어떻게 아이들을 제대로 성장하도록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모임입니다. ‘빈부의 격차가 큰 지역에서 자신의 아이들이 부모들의 빈부와 관계없이 어떻게 어울려 놀 수 있게 할 것인가? 가난한 것을 나쁨이 아니라 조금 다름이고 이해할 수 있는 마음 씀씀이를 가진 아이로 자라나게 할 것인가?’ 에서 모임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유별나게 극성이라는 강남의 ‘있는’ 엄마들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하다못해 분유 광고에서조차 ‘우리 아인 특별하니까’라고 광고하는 현실을 돌아본다면 ‘내 아이만 최고로 잘 키우자’가 아니라 ‘더불어 같이 살 줄 아이로 키우자’는 오류동 아줌마들의 모임은 특이해 보입니다. 마음으로는 비슷한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실천까지 이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마음 모으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다는 사실에 존경의 마음과 함께 응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행복은 그 잘난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매일같이 공부 또 공부 지옥같은 입시전쟁터
어른들의 그 뻔한 얘기 이젠 정말 싫어요
행복과 성적이 정비례하면 우리들의 꿈은 반비례잖아요

행복은 그 잘난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자율학습 또 보충수업 시험 시험 시험 입시전쟁터
세상은 경쟁 공부 대학 출세 명예 돈
서로 서로 사랑 하고 나줘주는 세상은 어디

행복은 그 잘난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내 무거운 책가방속에 무엇이 들었을까
아주 공갈 사회책, 따지기만 하는 수학책,
외우기만 하는 과학책, 국어보다 더 중요한 영어책,
부를게 없는 음악책, 꿈이 없는 국어책

얼마나 더 무거워져야 나는 어른이 되나
얼마나 더 야단맞아야 나는 어른이 되나

행복은 그 잘난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1번 2번 3번 4번 넷 중에서 행복은 몇번
우리들 살고 싶은 사랑 가득한 세상
내 무거운 책가방 속엔 행복은 없고 성적 뿐이죠
행복은 그 잘난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오죽하면 저 노래가 나왔을까 싶습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청소년들을 청년들을 이해하는 척한다는 것은 민망합니다. 지금 40대인 우리가 20여 년 전에 한국의 교육 현실을 비판하며 흥얼거렸던 노래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습니다. 오히려 노래 속 비참한 현실은 더 굳건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유치원 시절부터 서너 개의 학원을 보내던 올케와 이야기를 나눌 때 대안교육 이야기를 꺼내면 올케는 손사래를 치며 “옳은 실천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런 실천을 하는 게 얼마나 큰 용기가 있어야 하는지 아세요?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쉽지 않아요”라고 하더군요. 충분히 공감 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문제의식을 느낀 우리가 지금 작은 하나부터 바꾸지 않는다면 다음 세대가 되어도 또 그다음 세대가 되어도 변화한 것은 없을 겁니다.

언젠가 유럽의 어느 나라 청년이 음악을 하기 위해서 배관공을 한다고 소개하며 학벌에 좌우되지 않고 스스로 원하는 것을 하며 살 수 있는 그 나라의 시스템을 부러워하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납니다. 부럽다면,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바로 지금부터 우리 아이들이 학벌에 좌우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기존 질서의 파괴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니까요.

민정연 <희망의 노래 꽃다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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