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륭전자 여성노동자들이 설을 앞두고 투쟁기금 마련을 위한 재정사업을 하느라 추위에도 전국의 현장을 누빈다. 그녀들의 재정사업은 단순히 투쟁기금을 모으는 활동이 아니다. 재정사업을 하면서 다른 이들에게 파견법의 문제를 다시 알리고 관심을 촉구시켜 지지와 연대를 모아, 그 힘으로 다시 투쟁을 이어가려는 것이다. 투쟁하랴 재정 확보하랴, 1600일이 넘는 투쟁에도 그녀들은 참 끈질기고 씩씩하다.

▲ 똥물테러를 당한 동일방직 노동자들.
지난 역사에서도 혹독한 탄압에 맞서 질긴 투쟁을 한 여성노동자들이 있다. 바로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이끈 여성노동자들이다.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경제성장’을 앞세워 1인 독재 권력을 강화한 유신체제를 뚫고 한국노총과 산별노조의 어용성에 저항해 ‘아래로부터’ 여성노동자들의 힘으로 세워졌다. 민주노조들은 교육, 소모임, 노동조건개선 같은 활동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70년대 내내 정권과 자본, 심지어 한국노총의 탄압에 맞서 민주노조를 지키기 위한 투쟁을 벌여야 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1978년 2월 21일 인천 동일방직에서 일어난 ‘똥물사건’ 이다.

섬유노조 동일방직 지부는 오래된 어용노조였다. 노동자들은 비밀소모임을 조직하여 힘을 키우다가 1972년 주길자 집행부를 구성하면서 노조를 민주화시켰다. 민주파 집행부는 조합원들과 같이 하는 일상 활동과 노동조건 개선투쟁을 벌여나갔다. 조합원들이 움직이면서 현장의 분위기가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이에 회사는 노조집행부를 회사편의 사람으로 바꾸려 했고, 1976년 대의원대회에서 노골화 되었다. 회사는 노동자들의 기숙사 문에 못질을 하여 감금한 채, 회사 편 대의원 24명을 모아 대의원대회를 열어 그들이 내세운 후보를 지부장으로 선출하였다. 이에 분노한 조합원들이 농성을 시작했고 기동경찰이 조합원들을 연행하려 하자 여성노동자들은 작업복을 벗어 던지고 속내의 차림으로 저항하였다. 경찰은 경찰봉으로 알몸의 여성노동자들을 때리고 구둣발로 짓밟으며 연행했다. 그러나 엄청난 폭력 앞에 수치심도 두려움도 떨쳐버린 돌발적인 나체시위로 여성노동자들은 민주노조를 지킬 수 있었다.

여성노동자들이 나체시위로 지킨 민주노조

탄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78년 2월 21일 대의원선거를 앞두고 민주파, 회사파 후보가 등록한 뒤 현장은 숨 막힐 것 같은 분위기에 휩싸였다. 회사는 조합원들의 모임은 ‘빨갱이 짓’으로 몰았고, “노조집행부가 산업선교회의 조종을 받는다”고 선전했다.

2월 21일 새벽 6시, 야근 반 퇴근자들이 막 작업을 마치고 대의원선출을 위한 투표를 위해 줄지어 나오고 있을 때, 갑자기 화장실 앞에 숨어 있던 5∼6명의 남성이 방화수통에 똥을 담아 가지고 달려들었다. 이들은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똥을 묻혀 조합원들의 얼굴과 온 몸에 바르고 뿌리고 먹였다. 달아나는 조합원들을 쫓아다니며 가슴에 똥을 집어넣고 통째로 뒤 집어 씌우기까지 하였다. 심지어 탈의실과 기숙사까지 쫓아 들어와 똥을 뿌려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경찰관과 섬유노조에서 파견된 간부들은 다급한 여성조합원의 구원 요청을 무시하고 방관했다. 이어 남성들은 지부사무실에 마련된 투표함과 사무용구들을 몽둥이로 부수고 사라졌다. 공장에는 여성조합원들의 분노에 찬 울부짖음만이 처절하게 울렸다. "아무리 가난하게 살았어도 똥을 먹고 살지는 않았다!"

이 사건은 회사와 섬유노조 본조, 중앙정보부의 합작품이었다. 이들은 이 사건을 ‘일부 열성 조합간부와 반대파 조합원들 사이의 조합주도권 쟁탈전’이라고 몰았다. 회사는 명동성당에서 항의 농성하는 124명의 노동자를 해고했고, 섬유노조 본조 위원장 김영태는 해고자 124명의 명단을 작성해 전국 사업장에 배포해 이들의 재취업조차 미리 막았다. 노동자의 생존권을 가로막는 악명 높은 ‘블랙리스트’ 가 섬유노조 위원장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탄압을 거쳐 여성노동자들은 투쟁의 대상이 더 이상 회사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권에 저항하고 노동자 조직이라는 탈을 쓴 섬유노조를 뒤집기 위해, 이들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복직투쟁을 벌였다. 그녀들은 ‘똥물사건’을 연극공연을 하거나 섬유노조 위원장 김영태의 통일주체국민대의원 출마저지투쟁, 명동성당 단식농성, 한국노총점거투쟁을 벌였다. 다른 민주노조들과 반 독재세력, 나아가 스웨덴, 카나다, 일본 등 해외에서도 지지와 연대가 쏟아졌다.

회사와 어용노조 그리고 중앙정보부의 합작품

신군부정권이 들어서고 법정투쟁에서 패배하자 여성노동자들의 복직투쟁은 끝난 듯했다. 그러나 그녀들은 나이 50이 넘은 2000년대 들어 다시 복직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똥물사건에 중앙정보부가 개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녀들이 다시 시작한 복직투쟁은 인간으로서의 자존심과 노동자의 명예를 역사적으로 되살리려는 것이었다.

나체시위까지 하면서, 똥물사건을 겪으면서, 왜 여성노동자들은 민주노조를 지키려 했을까. 동일방직의 한 조합원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노동자들이 왜 이렇게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지, 한 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소중한지, 한 사람이 바뀌면 얼마나 큰 변화를 일으키는지를 동일방직의 노조활동을 통해 배웠습니다. 더불어 인간의 존엄성과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은 때였지요."

그녀들에게 민주노조는 한 사람 한사람의 변화가 모여 큰 힘이 된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과 노동자의 역할을 깨닫게 해주어서 자신과 분리할 수 없는 소중한 조직이었다. 그녀들의 투쟁은 정권과 자본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민주노조운동의 전통을 세웠으며, 그 기풍은 85년 구로동맹파업, 87년 대투쟁을 거쳐, 민주노조운동의 소중한 정신을 이루게 되었다. 어떤 이는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진출한 대공장-남성노동자들의 민주노조운동은 70, 8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일궈온 여성노동자들의 무등을 타고 올라섰다”고 말한다.

곧 70년대 민주노조를 중심으로 한 여성노동자들의 치열하고 헌신적인 투쟁이 지금의 민주노조운동을 싹틔운 것이다. 지금의 민주노조운동은 똥물을 뒤집어쓰면서, 나체시위를 하면서 민주노조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선배 노동자들에게, 어떻게 그 빚을 갚을 것인가. 다시 30년 전의 역사를 돌아보고 다져볼 일이다.

유경순 /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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