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노동자를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로 양분해서 바라보던 시각이 있었다. 대학진학율이 30%에 미치지 못하던 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인문계 고등학교 들어가서 공부 열심히 해서 4년제 대학 입학해 어떻게든 졸업해서 대기업에 취직해 ‘화이트칼라’ 노동자가 되는 것이 이 사회에서 중산층으로 자리 잡는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이 보편적이었다.

힘들게 모은 등록금 내고 대학 졸업시킨 후 취업이 돼서 말 그대로 하얀 셔츠에 넥타이 매고 양복 입고 출근하는 자식의 모습을 보면서 뿌듯해 하는 대한민국 부모들의 ‘정성’은 문맹율 0%, 대학진학률 80%라는 고학력 인플레이션 대한민국의 오늘을 만들어 냈다. 그 결과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12년 대한민국 화이트칼라, 사무직 노동자는 총 427만명으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주요한 계급, 계층으로 자리 잡았다. 역설적으로 가장 조직화가 안 된 계급, 계층이고…….

▲ 화이트칼라가 주요 소비자인 복사용지 TV광고를 보면 인도의 여신처럼 손이 6개인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물론 화이트칼라의 유니폼이라고 할 수 있는 하얀 셔츠에 넥타이 차림으로. 그렇다. 화이트칼라의 가장 큰 고충 중의 하나는 노동의 범위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

최근 TV 광고에 등장하는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사무직 노동자라고 해서 노동현장의 상황은 블루칼라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먼저 화이트칼라가 주요 소비자인 복사용지 TV광고를 보면 인도의 여신처럼 손이 6개인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물론 화이트칼라의 유니폼이라고 할 수 있는 하얀 셔츠에 넥타이 차림으로. “입사 전에는 제 손도 2개였죠. 내 일 좀 하려면 딴 것 시키고, 또 딴 것 시키고, 또 시키고, 또 시키고…… 지금은 손이 열 개라도 모자라요.”

그렇다. 화이트칼라의 가장 큰 고충 중의 하나는 노동의 범위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 특히 IMF 이후 노동강도가 4~5배는 강화됐다는 것이 보편적인 인식이라는 점을 보면 화이트칼라의 노동강도도 만만치 않게 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신의 업무뿐만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잡무들은 상상을 초월한다.

주말업무와 야근도 마찬가지다. 최근 유머코드 광고로 화제를 불러일으킨 구인구직 사이트 ‘잡코리아’ 광고를 보면 주말업무는 물론이고 24시간 근무 모드의 화이트칼라의 애환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 화이트칼라들, 특히 영업직은 대한민국 특유의 접대문화 속에서 자신에게 일을 주는, 그래서 어찌 보면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클라이언트들과 저녁 식사, 저녁 술자리를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업무의 일환으로 생각하고 있다.

‘접대도 업무의 연장이다’라는 격언을 가슴속에 품고 클라이언트를 즐겁게 하기 위해 넥타이를 머리에 질끈 묶고 셔츠를 풀어헤치며 노래방 테이블 위로 올라가 ‘즐거운 접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화이트칼라는 심야시간에 노래방에서도 일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화이트칼라에게 단순 노동강도 혹은 주말, 야근 등 연장노동 문제는 사실 조기퇴직의 위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지난 겨울 한 경제연구소에서 발표한 ‘중장년 화이트칼라 지속고용과 과제’라는 보고서를 보면 대한민국 화이트칼라의 체감정년은 53세로, 자녀교육과 결혼, 주택대출 상환 등 소비지출이 최대에 이르는 시점에 조기퇴직에 대한 위협에 시달리게 된다.

버티다, 버티다 밀려나 조기퇴직으로 회사라는 조직을 벗어나면 이들은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사회적 무능력자가 돼 버린다는 점이 더 무섭다. 그래도 회사라는 조직의 보호 속에서 부하직원들한테 큰 소리 치던 화이트칼라가 사회에 나와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위험천만한 프랜차이즈 치킨집 창업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자칫 잘못해서 화이트칼라 30년 동안 모아 놓은 투자금을 날려버리기라도 한다면 순식간에 사회적 약자, 혹은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자신들의 불안한 미래를 잘 알고 있기에 화이트칼라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회사와 조직에 더 충성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최근 방송을 타고 있는 KFC광고를 보면 젊은 화이트칼라 직원들을 KFC라는 패스트푸드를 가고 싶은데 ‘밥’이 아니면 싫다는 부장님 눈치를 보다가 결국 치킨과 밥이 같이 나오는 메뉴를 선택한다는 스토리라인을 보여주고 있다.

한독약품의 훼스탈 광고를 봐도 먹기 싫은 순댓국을 윗사람들의 취향이라는 이유로 1주일 내내 먹어야 하는 젊은 화이트칼라의 애환을 그리고 있다. 노동의 통제권은 말할 것도 없고, 점심 메뉴선택권 조차도 윗사람들의 눈치를 봐야하는 대한민국 화이트칼라. 그들의 오늘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

김범우 광고회사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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