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자파견법 시행 초기였던 90년대 말, 지하철 안에 붙어있던 어느 파견회사의 광고를 본 기억이 납니다. 깔끔한 정장을 입고 서류파일을 팔짱에 낀 예쁜 여성이 활짝 웃고 있는 모습 옆으로 광고 문구 한 줄이 큼지막하게 적혀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2년씩 일해요” 파견노동자를 마치 프리랜서 자유직인양 홍보하던, 지금 보면 누구나 어이없어 할 광고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자유’가 어떤 자유인지 잘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2년씩 일해요”

큰 무역회사 임원차량 운전기사로 파견되어 일하던 분이 상담하러 온 적 있습니다. 2003년쯤이었을 겁니다. 아무런 통보 없이 그냥 2년 3개월째 일하고 있다며, 이러면 법에 따라 사용사업체 직원이 된 것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소속을 보니 재벌그룹 계열 대형 파견회사입니다. 그런 회사가 업무상 실수를 했을 리도 없고 어떻게 된 일일까, 파견이라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용역이나 도급계약으로 되어있겠지 예상하며 서류들을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회사가 실수를 한 것이 맞습니다. 워낙 여러 사업장에 많은 이들을 파견하다 보니 무역회사에 혼자 파견된 이 사람에 대해서는 깜빡 잊고 2년을 넘겨버린 겁니다.

당시만 해도 법 시행 초기다 보니 그런 횡재(?) 같은 일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적법한 파견관계에서 그러한 고용의제규정(근로자파견법 상 파견근로자 최대 사용기한인 2년이 초과되면 사용사업체 노동자로 간주하도록 되어있는 규정. 현재는 고용의무규정으로 바뀜)이 실제 적용되는 경우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파견노동자가 마음에 들어 혹시라도 직접 채용하고 싶은 사용사업주라면 그냥 채용을 하지 고용의제규정의 적용을 기다린다는 건 현실성이 없는 얘기죠. 문제는 도급계약 등의 형식을 가장한 불법파견의 경우입니다.

▲ 고용과 사용을 분리하는 간접고용은 따져보면 중간착취나 인신매매와 다를 바  없다. 한 노동자가 파견법-비정규직 철폐를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신동준 편집국장

일시키는 사장 따로, 임금 주는 사장 따로

대형마트에서 해고된 판매원이 저희 센터를 찾아왔습니다. 남편이 병으로 누워있어 네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던 중년의 아주머니였습니다. 대형마트의 판매원 모집공고를 보고 지원을 해서 직무교육을 받고 매장에 배치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린이용품매장에서 일하다 마트 측의 지시로 몇 번 코너를 옮겨 곡물매장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월급이 다른 회사 이름으로 지급되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마트 직원이 아니라 각 매장 상품 납품업체 소속이더랍니다. 그렇게, 같은 마트 내에서 코너를 옮길 때마다 형식적으로는 퇴사와 입사를 반복해온 것입니다. 결국엔 납품업체가 부도가 나 매장이 빠지는 바람에 덩달아 해고까지 돼버렸습니다. 채용부터 사용 및 해고까지 대형마트가 분명한 실제 사용자였음에도 대형마트는 해고책임에서도 자유로운 법상 제3자의 지위를 주장하고 인정받습니다.

노동부에 불법파견 진정을 해볼까도 했지만 그건 다수의 파견노동자들이 집단적이고 조직적으로 진행하는 경우에나 그나마 실익이 있을까, 그 절차를 통해 개별 노동자가 얻을 것은 없어보였습니다. 고용의제규정은 적법한 파견의 경우에만 적용된다는 것이 노동부의 어처구니없는 입장인 상황에서 불법파견 판정을 받아봐야 복직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이번 기회에 외양만 형식적으로 바꾸어 위장도급의 본질은 더 튼튼해지는 결과를 만들어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밥줄이 걸려있는 사안이라, 동료 직원들이 도움은커녕 오히려 위장도급이 아니라며 회사 편을 들 가능성도 커 불법파견 판정 자체도 쉽지 않다는 판단이었습니다.

고용의 원칙이 무너진 시대

대형마트나 대공장 사내하청은 물론, 이제는 도급을 가장한 불법파견이 마치 적법한 고용형태인양 거의 모든 산업과 업종에 만연해 있습니다. 상담을 받다보면 대한민국은 불법파견 천국입니다. 그나마 불법파견임을 인정받으려면 무엇보다 원청(도급)회사가 하청(수급)회사 노동자들을 직접 지휘감독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입증해내야 합니다. 법 시행 초기에나 어설픈 사용자들이 흔적들을 남기는 바람에 인정된 사례들이 간혹 있었지만 이제는 워낙 교묘하게 적법한 도급인양 외양들을 갖춰놓아 불법파견 판정은 그야말로 가뭄의 콩 나기입니다. 최근 어느 한 은행은 사내 하청노동자들에게 직접 행하는 업무지시를 하청회사를 통해 지시가 내려지는 것으로 곧바로 바꿔주는 전산시스템을 도입했다는 얘기도 들려옵니다. 기술의 발전마저 놀랍습니다.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사용자가 그 노동자에 대한 사용자책임을 지는 것은 고용관계의 당연한 원칙입니다. 근로자파견법은 파견노동자들에 대한 주기적 해고를 통해 이들을 떠돌이 노동자 신세로 만들어놓았고 이 법을 피해가며 갖가지 형태로 양산 및 조장되고 있는 각종의 불법파견 간접고용형태들 속에서 실질적인 사용자들은 사용자로서의 법상 책임을 아무것도 지지 않고 있습니다. 고용과 사용을 분리하는 간접고용은 따져보면 중간착취나 인신매매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고용의 원칙이 무너진 시대, 수많은 간접고용 노동자들이 쓰는 놈 따로 책임지는 놈 따로 인 어처구니없는 현실 속에서 오늘도 이리저리로 팔려 다니고 있습니다.

박성우 / 민주노총 서울본부 법규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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