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사람이 있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앞 철탑 위엔 현대차 비정규직 불법파견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105일째(1월 29일 기준) 농성을 벌이고 있는 천의봉· 최병승씨가 있다. 한상균 전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위원장과 문기주 정비지회장, 복기성 비정규직 수석부지회장은 쌍용차 해직자 문제해결과 국정조사 등을 주장하면서 싸늘한 겨울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71일째 쌍용차 평택공장 앞 송전탑 위에서 힘겨운 하루를 매일 보내고 있다. 충남 아산 유성기업에 인접한 자동차전용도로 굴다리 난간 위에도 사람이 있다. 홍종인 금속노조 유성기업 아산지회장이다. 그는 사측의 노조파괴 중단을 요구하며 101일째 땅을 밟지 못한 채 혹한을 견디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없다. 1월 23일~1월 29일 사이 지상파 방송 3사의 저녁뉴스 속에선 100일 안팎의 시간을 철탑 위에서 버티며 절실한 목소리를 내는 이들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1월 26일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 등을 응원하기 위해 1800여명이 ‘희망’이라 이름 붙은 버스에 올랐을 때도 KBS와 MBC, SBS는 ‘언제나 그랬듯’ 철탑 위의 노동자들을, 이들을 응원하는 시민들의 존재를 외면했다. 단 한 차례, KBS <뉴스9>가 1월 29일 쌍용차 문제를 전했지만 쌍용차 국정조사 문제를 놓고 여야가 의견차를 보여 1월 국회에 이어 2월 임시국회도 파행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당연히 철탑 위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없었다.

혹자는 묻는다. 아직도 방송이란 이름의 언론을 향해 남겨둔 기대가 있냐고 말이다. 쌍용차 대량해고 사태 이후 20명 이상의 목숨이 세상을 등졌을 때도,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 철회를 요구하며 24일 동안 곡기를 끊고 급기야 309일 동안 크레인에 올랐을 때도 방송은 이들을 향해 카메라를 들지 않았던 걸 잊었느냐는 질문이다.

“그래도……”라고 답하려다 이내 입을 다문다. 공공재인 전파를 사용하는 지상파 방송, 특히 KBS·MBC와 같은 공영방송의 역할을 말하는 게 공허해서가 아니다. 입안으로 삼킨 얘기 속 주인공들이 더 이상 마이크와 카메라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일개 회사의 노사 문제로 벌어진 현장에 가야 하느냐”며 냉소를 보이던-한때는 선배였던-간부들과 끊임없이 마찰을 빚으면서도, 곡기를 끊고 철탑에 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며 맞섰던 이들 말이다.

▲ 1월 23일~1월 29일 사이 지상파 방송 3사의 저녁뉴스 속에선 100일 안팎의 시간을 철탑 위에서 버티며 절실한 목소리를 내는 이들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1월 26일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 등을 응원하기 위해 1800여명이 ‘희망’이라 이름 붙은 버스에 올랐을 때도 KBS와 MBC, SBS는 ‘언제나 그랬듯’ 철탑 위의 노동자들을, 이들을 응원하는 시민들의 존재를 외면했다. 노조 투쟁사업장 조합원들이 인수위 앞에서 기자회견 도중 구호를 외치고 있다. 신동준

권력과 같은 위치에 서있지 않은 사람들의 삶을, 목소리를 담아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하던 이들은 더 이상 언론인이나 언론인으로 기능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MBC만 해도 기자·PD 등 10명의 구성원들이 ‘공정한’ 방송을 하자고 말하다 해고됐다. 몸이 철탑 위에 있지 않을 뿐, 마음에 스미는 매서운 바람은 매한가지의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들만이 아니다. 지난 5년 동안 450명에 달하는 방송·언론인들이 권력에 가까운 위치에 있으려 노력하는 낙하산 사장들과 그들의 휘하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불공정한 방송 환경에 저항하다 목소리를 뺏겼다. 최소한의 사실조차도 말할 수 없는 곳으로 쫓겨나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하지만 언론인들을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높은 철탑과 같은 현실로 내몬 그들은 작금의 상황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쫓겨난 언론인들의 생각과는 반대 방향의 방송을 열심히 만들며 살고 있다. 한때는 선배였고 동료였던 이들의 삶에 대해 전혀 생각조차 않는 듯 말이다. 그런 그들에게 무슨 소리가 들릴 수 있을까. 모든 것을 걸고 100일이 넘는 시간 동안 철탑 위에서의 삶을 선택한 이들의 목소리나, 소리 내어 울 수조차 없을 만큼 불공정한 삶 앞에 목숨마저 버린 이들의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절규도 그들에겐 당연히 들리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그곳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했던 이들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결국 그들은 없는 것이다. 존재까지도 무(無)존재로 만드는 대단한 방송 현실이다.

김세옥 / <PD저널> 기자

저작권자 © 금속노동자 ilabo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