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탈출 넘버원’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다. 사소한 부주의가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여러 사례들과 적절한 대처방법을 일러주는 프로그램이다. 달군 냄비에 물을 부으면 안된다는 것, 전자레인지에 밤을 넣으면 폭발한다는 것, 블라인드 끈 같이 약한 끈에도 아이들이 질식사할 수 있다는 것 등을 이 프로그램을 보며 알게 됐다.

조만간 이 프로그램에서 화학물질 누출 사고가 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시민들에게 일러줄 것 같다. 그런 심각한 사고가 났을 때 믿을 수 있는 건 자신 밖에 없으며, 관계기관의 지시를 믿기보다 스스로 알아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구미 불산 누출사고를 보며 새삼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산 같은 유해화학물질을 관리하는 책임은 환경부에 있다. 정작 환경부는 사고 발생 두 시간이 지나서야 사고를 접수했고 아홉 시간이 지나서야 현장조사에 들어갔다. 불산은 공기 중으로 빠르게 확산되는 물질이라 누출이 되면 일단 대피하는 게 순서지만 주민들은 두 시간이 지나서야, 관계당국도 아닌 이장님의 판단으로 대피했다. 마을주민들은 동네에 있는 공장에서 그런 유독물질을 다루고 있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역 소방서에 불산 같은 화학물질이 누출됐을 때 처리할 수 있는 장비나 정보가 전혀 없었다. 대피시스템이나 구호체계가 전무했던 것이다.

▲ 유출사고가 난 <휴브글로벌> 주변 은행나무와 소나무가 말라 죽어가고 있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유해화학물질관리법’에 따라 주민들에 대한 사전위험고지와 대비조치에 대한 의무를 진 환경부는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이번 사고에서 환경부가 한 일이라곤 뒤늦게 현장에 도착해 몇 가지 조사를 한 후 사고 다음날 조사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위기상황을 심각단계에서 해제하고 주민들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한 것이다. 하필 그날 오후는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후보가 현장을 방문하기로 한 날이기도 했다. 환경부는 사고 당시 대기 중 불산농도는 1ppm정도라고 했지만 환경단체들의 조사결과 최고 15ppm에 이르렀던 것으로 드러났다. 환경부가 사고를 덮기에 급급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심상정 국회의원에 따르면 사고를 낸 업체는 3년 전에도 불산 누출로 노동자가 화상을 입는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고용노동부는 이 업체에 안전점검 한 번 진행한 일이 없다. 주민들은 아직까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는데도 사고가 일어난 곳 인근의 노동자들은 사고 당시부터 지금까지 계속 일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노동자들의 안전 따위는 애초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상황이 이 정도 되면 환경부든 고용노동부든 누군가는 문책을 당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게 상식이지만, 아직까지 주민들이나 노동자들에게 사과하고 책임지겠다는 모습을 보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고 한 달이 돼가니 언론에서도 불산 누출 소식은 잠잠해지고 있다. 그러나 인터넷에선 불산이 어떤 영향을 얼마나 오래 미치는지에 대한 정보들이 오가며 불산 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화학물질에 대한 공포, 담장 너머에 있는 공장에서 대체 무엇을 취급하고 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가고 있다.

그러자 정부는 시민들의 이런 염려를 ‘괴담’이라고 일축하며 ‘불산에 관한 오해와 진실’ 같은 보도자료를 내놓고 있다. 불산누출사고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피해를 확산시킨 것에 대한 어떤 사과나 책임도 없이 말이다. 괴담이나 오해가 바로 정부 당국의 무책임한 태도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누구도 정부의 말은 믿지 않는다는 것을 세상사람들은 다 아는데도 말이다.

정명희 / 녹색연합 정책팀장

저작권자 © 금속노동자 ilabo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