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한 밤. 심각한 표정을 한 노동자 수십명이 전남 광양 백운산 모처에 모여들었다. 펜을 잡았다. 각자 유서인지 편지인지 모를 글을 썼다. 목숨 건 크레인 농성을 하루 앞두고 가족들에게 남길 말이었다. 편지를 쓴 노동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또 해야 하나? 6개월 전 올랐던 그 곳에 또 오를 수밖에 없나?’ 크레인에 오르기로 한 사람이나 밑에 남아서 싸우기로 한 사람이나 비통한 마음에 눈물을 글썽거렸다. 크레인 농성이 얼마나 힘든 일인 지 이미 경험했기 때문에 기분이 더 착잡했다. 다음날인 2006년 4월 19일 순천 현대하이스코비정규직지회의 2차 크레인 농성이 시작됐다.

▲ 2006년 4월 19일 벌인 2차 크레인 농성. 농성자들이 공장 밖에 해고자 복직약속을 지키라는 내용의 현수막을 내 걸었다. 현대하이스코비정규직지회 제공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찡하고 떨리네요.” 14일 지회 간부 수련회 장소에서 만난 정경진 지회 조직부장이 당시를 떠올렸다. 이날 수련회 장소는 6년 전 2차 크레인 농성을 하루 앞두고 조합원들이 모였던 광양 백운산이기도 했다. 정 조직부장은 1차에 이어 2차 크레인 농성에도 결합했다. 이들이 당시 6개월 만에 또 크레인에 오르기로 한 것은 2005년 크레인농성의 결실이었던 ‘확약서’가 휴지조각이 됐기 때문.

배경은 이렇다. 현대하이스코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005년 6월 총회를 열고 지회를 설립했다.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 환경을 조금이나마 개선해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전체 조합 가입대상 절반을 넘는 250여명이 금속노조에 가입했다. 그러자 회사는 곧바로 지회 간부들을 타 지역으로 발령하거나 직무정지 조치를 하는 등 탄압에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회 조직력이 좀처럼 약해지지 않자 회사는 끝내 사내하청업체를 폐업하는 방식으로 조합원 120여명을 길거리로 내몰았다.

지회 설립하자 업체 폐업으로 길거리에

소박한 소망을 가지고 시작한 노동자들은 졸지에 해고자 신세가 됐다. 분노한 노동자들은 그해 10월 24일 공장 내에 있는 12m 높이 크레인 7대를 점거했다. “당시엔 팔뚝질도 어색하고 투쟁가도 몰랐던 우리들이었어요. 하지만 우발적인 투쟁은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의지를 모아 벌인 싸움이었죠. 내일모레 돌잔치 앞두고 결단한 조합원도 있었습니다.” 당시 수석부지회장이었던 김종안 정책기획부장이 2005년을 떠올렸다.

▲ 14일 현대하이스코비정규직지회 간부수련회 장소에서 만난 김종안 지회 정책기획부장이 지회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상민

크레인에 오른 노동자 60여명은 경찰과 회사의 폭력적인 침탈을 막아내며 11일을 버텼다. 추위와 배고픔으로 고통스러웠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생라면 씹어 먹고, 꽁초 주어다 담배 피우고, 안 그래도 추운데 물대포까지 쏴대니 잠도 잘 못 자겠고…. 고생 참 많았죠.” 7년이 흘렀지만 김 부장은 아직도 그 때 겪은 일들이 생생하다.

다행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목숨 건 투쟁이 알려지면서 공장 밖에서도 연대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점거 다음날인 25일에는 민주노총광주전남본부 소속 노동자 수천 명이 공장 진입을 위해 경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지역 내 각종 시민사회단체들도 현대하이스코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대화에 응해야 한다며 지원에 나섰다. 아울러 지역 노동청과 시의회, 순천시장도 회사를 압박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노조 인정받겠다고 시작한 우리 싸움이 그렇게 커질 줄 정말 몰랐어요. 우리 스스로도 놀랐습니다.” 김 부장은 “당시 경험으로 연대의 힘이 위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며 이 같이 말했다. 그렇게 하이스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적극적인 투쟁과 연대에 힘입어 노동자들은 △폐업에 따른 실직자 우선 취업 △노조 활동 보장 △민형사상 문제 최소화 등이 담긴 ‘확약서’를 따내고 점거농성을 풀었다. 확약서에는 사내하청업체 대표뿐 아니라 하이스코순천공장 대표도 함께 서명했다. 또한 노사 간 약속을 보증한다는 의미로 당시 순천시장도 확약서에 이름을 올렸다. 농성 11일째였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커진 싸움

▲ 고공농성을 세차례나 경험한 정경진 현대하이스코비정규직지회 조직부장은 "필요하다면 네 번이든 다섯 번이든 또 올라갈 수 있다"고 말한다. 현대하이스코비정규직지회 제공
“합의서가 아니라 확약서라니 이름부터 좀 수상하죠? 지금 생각하면 그걸 믿고 크레인에서 내려오는 게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정경진 조직부장은 “당시 우려도 있었지만 일단 노사정이 모두 모여 약속을 한 것인 만큼 믿어보기로 의견을 모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려는 현실이 됐다. 복직은커녕 노동자들에게는 72억원에 달하는 손해배상, 가압류가 떨어졌다.

“안 그래도 핵심 간부들이 대거 구속돼 어려운 상황이었죠. 확약서가 이행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일부 조합원들이 희망을 버리고 떠나가기 시작했어요. 그 때 혼자 순천왜성에 올라 공장 바라보며 많이 울기도 했죠.” 당시 지회장 구속으로 직무대행을 맡았던 김종안 정책기획부장에게는 그 때가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라고 말한다.

어려운 조건이었지만 다시 머리띠를 묶었다. 2006년 2월에는 진눈개비 내리는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확약서이행’에 맞춰 다섯 걸음을 걷고 한 번 절을 하는 5보1배 투쟁을 벌였다. 그렇게 온 몸을 적시며 서울 하이스코 본사 건물을 찾았지만 노동자들은 건물 안에 발도 들이지 못한 채 “하청회사 문제라서 우리는 상관없다”는 답만 들어야 했다. 돌파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노동자들은 2차 크레인을 점거농성을 결의했다.

4월 19일 새벽 5시 노동자 30여명은 공장 내 크레인을 접수했다. 하지만 이번엔 회사와 경찰도 대비를 하고 있었다. 농성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특공대가 투입됐다. 노동자들은 격렬히 저항했지만 테러진압무기인 ‘테이져건’까지 사용한 경찰특공대의 무자비한 공격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속전속결. 농성자들은 7시간 만에 강제 진압됐다.

테이져건 무장한 특공대 투입에 좌절

정경진 조직부장은 “2차 점거농성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자 모두들 침통해 하는 분위기였다”고 말한다. 어려운 상황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거라 더 좌절감이 컸다는 것. 이 정도 되면 구속된 동료들이 나오길 기다리며 숨고르기에 들어가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선택한 길은 달랐다. 또 ‘정면돌파’였다. 노동절인 5월 1일, 이들은 ‘더 높은 곳’에 올랐다. 공장 안이 아니라 서울 양재동 현대기아차그룹 본사 건설현장 타워크레인이 타깃이었다.

▲ 1차 크레인 농성의 결실인 확약서가 휴지조각이 된 후 2006년 현대하이스코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서울로 올라와 눈이 내리는 날씨에 5보 1배 투쟁을 벌였다. 현대하이스코비정규직지회 제공

“우리 지회에서 유행한 구호가 ‘정면돌파’였습니다. 조합원들이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물러서지 않는다’는 가사의 ‘불패의 전사들’이었고요. 2차 점거가 실패했다고 머뭇거리거나 물러선다면 더 많은 조합원들이 떨어져 나갔을 거예요. 그래서 또다시 승부수를 던져보기로 했습니다.” 김종안 정책기획부장이 3차 고공농성을 단행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 현대하이스코비정규직지회는 어려운 조건에서도 2006년 5월 1일부터 서울 양재동 현대차그룹 본사 건설 현장에 있는 타워크레인을 점거하는 '정면돌파'의 길을 택했다. 현대하이스코비정규직지회 제공
3차 고공농성은 두 명이 결행했다. 이 중 한 명은 1, 2차 크레인 농성에도 참가했었던 정경진 조직부장. “솔직히 두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올라가야 하냐는 생각도 좀 들었죠. 하지만 동료들을 믿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분노로 참을 수 없었어요. 확약서에도 불구하고 구속된 동료들, 회사의 회유와 협박 때문에 스트레스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간 조합원 부모님, 스트레스 때문에 아기를 유산한 조합원 아내들. 이런 모습 보면서 주저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세 번이나 크레인에 올랐던 심정을 묻는 질문에 정 부장이 답했다.

5월 1일 새벽, 양재동 건설현장엔 덩치 큰 경비들이 이미 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비슷한 건설현장에서 모의 연습까지 했던 두 노동자들은 경비들을 제압하며 점거에 성공했다. 꼭대기까지 통로가 하나밖에 없는 건설용 타워크레인이라 강제 진압은 쉽지 않았다. 이들의 점거 농성 성공 소식에 힘입어 같은 날 순천에서 열린 광주전남권 노동절 집회 참가자 1천여명은 하이스코 공장진입투쟁을 치열하게 벌였다. 가족들은 어린이날인 5월 5일 대통령을 만나겠다며 청와대로 향하는 등 지원 사격에 나섰다. 3차 고공농성이 꺼져가던 투쟁의 불씨를 살린 셈이다.

꺼져가던 불씨 살린 세 번째 고공농성

그룹 본사까지 ‘습격’당한 회사는 결국 두 손을 들었다. 3차 고공농성 13일 째인 5월 13일, 회사는 △2007년 6월까지 해고노동자 전원 단계적 복직 △72억 손배소송 취하 및 가압류 철회 △고소고발 취하 및 형사처벌 최소화를 위한 탄원서 제출 △노조 활동 보장 및 지회 사무실 마련 등을 약속했다. 이번엔 ‘확약서’가 아닌 ‘합의서’였다. 이 투쟁으로 구속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정 부장은 “합의서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에 날아갈 것 같았다”고 당시를 기억한다.

회사는 합의서 이행과정에서 노동자들을 생산직이 아닌 경비업체에 복직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승기를 잡은 노동자들을 굴복시키진 못했다. 노동자들이 당시 비자금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을 쫓아다니며 소위 ‘정몽구 그림자 투쟁’을 벌였다. 그러자 회사는 결국 모든 해고자들을 원직에 복직시켰다.

▲ 현대하이스코비정규직 투쟁이 성과를 낼 수 있었던 배경엔 활발한 지역 연대투쟁이 있었다. 사진은 2006년 4월 27일 공장진입투쟁 모습. 현대하이스코비정규직지회 제공

지회를 설립하고 2년. 치열한 투쟁의 기간이었지만 겉에서 보기엔 회사로부터 노조 활동을 보장받은 것 말고 노동자들이 특별히 얻은 것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들의 얘기는 다르다. “당시 투쟁을 겪은 이들은 가슴속 깊이 각인된 게 있습니다. 생사고락을 함께하면서 느꼈던 조합원들 간 ‘의리’, 그리고 우리가 앞장설 때 지역과 전국에서 함께 싸워줬던 ‘연대’가 그것입니다. 우리에겐 복직과 노조활동 인정보다 훨씬 소중한 성과입니다.” 김종안 정책기획부장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복직과 노조 인정보다 소중한 성과물

지회 조합원들은 2006년 합의서 체결 직후 개인당 1백만원씩을 모아 총 1억원 가량을 만들었다. 이들은 이 돈을 하이스코 비정규직 투쟁에 연대하다 희생된 사람들의 구제비용과 비정규직 투쟁기금으로 쓰라고 민주노총지역본부에 전달했다. 김 부장은 “연대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투쟁 내내 온 몸으로 느꼈기 때문에 다들 기꺼이 그렇게 했다”며 “이 일로 당시 조합원들이 큰 자부심을 갖게 됐다”고 말한다.

▲ 연대의 소중함을 온 몸으로 느낀 조합원들은 2006년 5월 투쟁이 마무리된 직후 개인당 1백만원을 모아 마련한 1억원을 연대투쟁 희생자 구제비용과 비정규직 투쟁기금으로 쓰라고 민주노총지역본부에 전달했다. 현대하이스코비정규직지회 제공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내하청 비정규직 신분이라 회사가 언제 도발할지 모르는 일이죠. 하지만 과거처럼 우리가 의리로 뭉쳐 싸우면 이길 거라 자신합니다. 필요하다면 네 번이든 다섯 번이든 또 높은 곳에 올라갈 수 있어요. 동료들을 믿으니까요. 그래도 의리가 있다면 동료들이 설마 나한테 또 올라가라고 하진 않겠죠?” 고공농성만 세 번 경험한 정경진 조직부장이 웃으며 말한다.

처음엔 이들 모두 몰랐다. 그저 노조를 만들어 인간답게 살고자 시작한 일이 이토록 힘든 싸움이 될 줄. 그러나 한참 지나서 알게 됐다. 투쟁에서 이기는 방법이 사실 그리 복잡한 게 아니었다는 것을. 의리로 똘똘 뭉치고 연대가 뒷받침된다면 힘없는 사내하청 노동자들도 거대 재벌인 정몽구 회장의 현대차그룹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  *  *  *  *  *  *  *  *  *

조합원 수 급증…“이제 새로운 단계로”
현대하이스코비정규직 지회, 해고자 전원 복직 후 지금까지

현대하이스코비정규직지회 해고노동자들은 2007년 6월까지 전원 복직했다. 이후 지회에는 어떤 변화들이 있었을까?

2007년부터는 지회는 사내하청업체들과 단체협약을 체결하는 등 나름 안정적인 궤도에 오르게 됐다. 지회 설립 전 정규직의 절반도 미치지 못했던 임금은 현재 두 배 가까이 인상됐고 고용에 대한 불안감도 없어졌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일터에서 노동자의 자존심을 지키며 떳떳하게 일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예전엔 사고로 몸이 다쳐도 잘릴까봐 쉬겠다는 얘길 못했어요.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게 됐죠. 이젠 현장에 불합리한 점이 있으면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따질 수 있습니다.” 14일 지회 간부 수련회 장소에서 만난 한 지회 대의원의 설명이다.

▲ 현대하이스코비정규직지회 간부들이 14일 광양 백운산휴양림에서 간부수련회를 진행했다. 이 곳은 지난 2006년 4월 2차 크레인 농성을 모의하기 위해 조합원들이 모인 장소이기도 하다. 김상민

수련회가 있던 이날 한 사내하청업체 현장에 퇴직연금제 도입을 둘러싸고 작은 갈등이 있기도했다. 수련회 도중 잠시 현장에 다녀온 한 대의원은 회사에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지, 뭔 말이 그렇게 많냐”고 목소리를 높였다며 웃는다. 예전 같으면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물론 아직 굵직한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처음 지회를 설립할 때부터 노동자들은 3조3교대를 4조3교대로 바꿀 것을 회사에 요구했지만, 회사는 아직 이를 수용하지 않고 있다. 여전히 노동자들은 ‘곱빼기’라 불리는 고된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곱빼기’란 교대조가 바뀌는 날 8시간만 쉬고 다시 출근해야하는 상황을 말한다. 김종안 정책기획부장은 “이런 날은 거의 가수면 상태에서 일을 하게 돼 산재 위험도 높다”고 증언한다.

사내하청 비정규직 자체를 정규직화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김 부장은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철강업종 상황도 하청업체가 독자적인 설비를 갖고 있지 않은 점, 정규직과 혼재작업이 이뤄지는 점, 원청으로부터 작업지시가 내려오는 점 등 불법파견을 법원에서 인정받은 현대차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지회는 현재 조합원들을 모아 불법파견 집단 소송을 벌이고 있기도 하다.

한편 지회의 불법파견 집단소송 사업을 계기로 최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조 가입이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과거 110~120명 수준이었던 지회 조합원은 최근 2백명에 육박하고 있다. 회사에서 각종 인맥을 동원해 조합 가입을 못하도록 회유에 나서고 있지만 잘 먹히지 않는 분위기라고.

이 같은 배경엔 집단소송 외에도 지회의 꾸준한 노력도 있었다고 한다. 김종안 부장은 “노동자들을 단결시키기 위해 업체 울타리를 넘어서기 위한 사업을 지속적으로 벌여왔다”고 말한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경우 여러 업체별로 나뉘어 있어 서로 친해지기가 쉽지 않은 게 보통. 지회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산악회, 축구, 족구, 당구, 낚시, 배드민턴 등 다양한 체육행사를 활성화하되, 업체별이 아닌 근무조별로 함께 하도록 했다. 또 최근엔 지회차원에서 아나바다운동(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고)도 추진하고 있기도 하다.

지회는 우선 조합원 수를 조합가입대상 절반이 넘는 250명까지 늘리는 것을 1차 목표로 두고 있다. 김홍주 수석부지회장은 “조합원 수가 늘어 파업으로 회사에 실질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역량은 이미 갖춰졌다”며 “올해부터 지회 투쟁은 새로운 단계에 진입하게 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저작권자 © 금속노동자 ilabo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