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8일 저녁, 뉴스 시청을 위해 TV를 켰다. 지난 1월 공정방송 회복을 주장하는 방송·언론인들의 파업이 시작된 이후 마음 편히 뉴스 본방 사수의 의무를 제쳐둔 터라, 제 시간에 뉴스를 시청한 건 실로 오랜만에 일이었다. 하지만 괜한 수고였다.

그래, 솔직히 기대한 건 아니다. 하지만 무려 32번째 죽음이었다. 1997년 18살의 나이로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 입사한 뒤 고온 테스트 공정에서 6년 동안 근무했고, 2010년 뇌종양 진단을 받은 뒤, 2012년 5월 7일 두 아이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난 고(故) 이윤정씨의 생명의, 아니 죽음의 무게에 모름지기 언론이라면-비록 파업 언론인들이 자리를 비운 상황이라도-지나가는 멘트로나마 관심을 표시하길 무작정 바랐던 것이다.

물론 삼성전자는 고 이윤정씨의 죽음이 32번째라는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와 삼성 반도체에서 근무하다 병을 얻은 노동자들, 그리고 그렇게 투병하다 사망한 노동자의 유족들은 “제품에 대한 예의만 있는” 삼성 반도체의 노동 환경이 치명적인 병을 유발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 고 이윤정씨가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6년간 일하다 악성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가운데, 5월10일 오전 서울 서초구 삼성 본관 앞에서 엄수된 노제에서 남편 정희수씨가 딸을 품에 안고 위로하고 있다. 이들 뒤쪽으로 고 이윤정씨의 영정사진이 운구차량에 놓여져 있다. <오마이뉴스> 제공

고 이윤정씨의 경우 반도체 칩을 고온에서 테스트하는 업무를 했는데, 이를 두고 김현주 단국대 교수(산업의학과)는 “업무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칩이 탔을 때 검은 먼지나 휘발성 유기화합물에 노출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반면 삼성전자는 일련의 죽음의 행진과의 관련성을 부인한다. 지난 2008년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이 발표한 역학조사 결과에 따르면 반도체 공장에서 백혈병 유발 가능 물질이 검출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관련성 역시 일반 인구 집단과 비교할 때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 4월 9일 근로복지공단은 삼성반도체 조립공장에서 5년 5개월 간 일하다 퇴사한 김모씨의 혈소판 감소증 및 재생불량성 빈혈을 산재로 판정했다. 그럼에도 삼성 측은 근로자의 보상 범위를 폭넓게 인정하는 추세에 따른 판정일 뿐, 질병과 업무관련성이 의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는 논리를 고수했다. 32명의 죽음도 이들에겐 그저 ‘우연’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삼성전자의 논리에 수긍하지 못하는 이들은 의문을 제기한다. 반도체 공장에서 일한 것과 발병과의 관련성이 없다면, 다시 말해 일반 인구 집단과 비교할 때 유의미한 통계가 도출되지 않았다면, 우리 주변의 직업인 10명 중 3명 정도는 백혈병 등의 발병이 일반적이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상식 수준의 의문이다.

물론 산업안전보건공단의 역학조사 결과는 존중될 필요가 있다. 반대의 주장이 있다고 하여 언론이 이를 과학적 조사 결과를 무시해선 안 될 일이다. 마찬가지로 일련의 조사 결과가 있다고 이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들을 외면해선 안 되는 것이다. 과거 진폐증도 수십 년 동안 산재로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치밀한 역학조사 등을 촉구하는 각계의 목소리와 이에 관심을 쏟은 언론 보도는 1985년 진폐의 예방과 진폐근로자의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정을 이끌어냈다.

한국의 대표적인 공영방송인 KBS의 방송 강령 전문은 “인간의 존엄성 존중”을 강조하고 있다. 또 제9항에선 정부나 공공기관, 사회단체, 기업 등이 제공하는 정보에 대해 진실여부를 가리도록 노력할 것을 적고 있다. 이는 KBS뿐 아니라 언론이라면 모름지기 지켜야 할 공통의 가치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진실을 캐기 위한 언론의 노력은 때론 좌절되고 때론 무력해진다. 실례로 지난 2010년 대전MBC의 시사 프로그램 <시사플러스>는 삼성전자 반도체 노동자의 백혈병 집단 발병 사건을 다루려다 사측의 중단 지시로 방송 자체가 무산됐다. 비슷한 시기 MBC <PD수첩>과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등도 모든 정보를 틀어쥐고 있는 삼성과 정부 등에 막혀 취재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최근 고 이윤정씨 사망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인 언론은 <경향신문>과 <한겨레>, 그리고 파업 방송·언론인들이 제작하는 <뉴스타파> 등 소수에 불과한 상황이다. 그러나 당장의 조사 결과는 삼성반도체 공장의 노동자들의 발병률에 대해 통계적으로 의미가 없다고 하지만 계속해서 사람이 죽어나가고 있으며, 사회적 문제제기도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다수 언론은 여러 이유로 침묵 중이다. 그리고 그 침묵으로 인해 언론은 생명의 무게에 아랑곳 않고 삼성의 또 하나의 가족이 됐다는 데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부끄러운 일이다. 지금, 그 부끄러움 앞에 일본의 한 소설가가 글을 쓸 때마다 원칙처럼 되새긴다는 문장을 던져 본다. “혹시 여기에 높고 단단한 벽이 있고, 거기에 부딪쳐서 깨지는 알이 있다면, 나는 늘 그 알의 편에 서겠다.”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벽과 알> 중에서)

김세옥 <PD저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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