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노조 조합원 되고 여지껏 살면서 가장 행복합니다.”
4월 30일 금속노조 인천지부 사무실에서 만난 박육남 조합원은 만면에 웃음을 띄고 얘기했다. 올해 나이 53세의 박 조합원은 4월 초 금속노조에 가입한 따끈따끈한 새내기다. “내가 요즘 사람들 만나면 자랑하는 게 두 가지 있어요. 하나는 대학생 됐다는 거랑, 또 다른 건 금속노조 조합원 됐다는 거예요.” 박 조합원은 올해 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 노동대학에도 입학했다. 현재 살고 있는 강화도에서 세 시간 걸려 지부에 신입조합원교육을 받으러 오면서도 노조에서 더 많은 걸 하고 싶다고 말하는데서 의지와 자부심이 느껴진다.

박 조합원은 현재 일하고 있는 사업장이 없다. 하지만 돌아가야 하는 회사는 있다. 박 조합원은 1970~80년대 서울 구로구 개봉동에 있는 한일도루코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가 1980년 해고됐다. 그리고 지난 4월 23일 33년만에 수원지방법원에 당시 해고가 부당하다며 해고무효확인소송을 제기했다.

박 조합원은 1976년 한일도루코에 입사했다. 여섯 딸 중 막내였던 박 조합원은 가정형편이 넉넉지 않아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중학교 졸업을 앞둔 그해 12월 회사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서울에 있던 사람들이나 중학교 졸업하고 입사했지 시골에서 초등학교도 못 다니고 올라와서 돈 버는 어린 노동자들이 정말 많았어요.” 시골에 있는 부모님께 생활비 보내고, 어린 동생들 학비 보태느라 열악한 상황도 감수하며 밤낮 가리지 않고 일해야 했던 때였다.

▲ “내가 요즘 사람들 만나면 자랑하는 게 두 가지 있어요. 하나는 대학생 됐다는 거랑, 또 다른 건 금속노조 조합원 됐다는 거예요.” 박 조합원은 올해 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 노동대학에도 입학했다. 현재 살고 있는 강화도에서 세 시간 걸려 지부에 신입조합원교육을 받으러 오면서도 노조에서 더 많은 걸 하고 싶다고 말하는데서 의지와 자부심이 느껴진다. 신동준

“그때는 12시간 맞교대에 일요일도 없이 일했어요. 너무 졸리니까 약 먹어가면서 잠 쫓고 버텼죠. 지퍼랑 면도날을 만들었는데 노동자들이 빼갈까봐 출퇴근 때마다 관리자들이 옷 검사를 하는 거예요. 도둑놈 취급 받는게 제일 싫었죠.” 한일도루코에는 1976년 앞서 노조가 만들어졌었다. 하지만 당시 노조 설립을 주도했던 이들이 회사의 회유에 의해 퇴사하거나 노조를 탈퇴하면서 설립필증만 있을 뿐 어떤 활동도 없었다. 그리고 일부 노동자들이 1978년 노조 재건 사업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시기를 맞게 됐다.

열일곱 살, 한일도루코에서 시작한 두 번째 삶

이때부터 박 조합원도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됐다. “노조가 뭐냐고 물어보니까 임금도 회사가 주는대로 안받고 협상해서 더 많이 받을 수도 있고, 교대 근무 하는 시간도 줄일 수 있다고 하는데, 그 말에 아주 뿅 갔죠.” 그 길로 박 조합원은 나서서 자신이 일하던 검사반 대부분의 동료들의 노조 가입 원서를 받았다. 그것이 계기가 돼 박 조합원은 노조 조사부원, 부분회장, 1980년에는 부위원장까지 하는 열성 조합원이 됐다. 박 조합원은 “그때는 정말 신바람이 났어요. 여기저기 교육받으러 다니고 조합원들이랑 등산, 야유회를 다니는데 어찌나 신이 나던지”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0년 전두환 정권 당시, 권리를 외치고 노조활동을 한다는 것이 어느 때보다 만만치 않던 때였다. 박 조합원은 1980년 12월 어느 날 조사할 것이 있다며 회사로 찾아온 이들에게 끌려가 20여 일 동안 말로 다 할 수 없는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다. “육군본부로 끌려가서 군복으로 갈아입히고 얼마나 때렸는지 몰라요. 불법감금에 폭행, 협박까지. 그래도 노조 위원장 어딨냐고 묻는데 우리 위원장 다치는게 싫어서 밥도 굶다시피하면서 묵비권으로 버텼죠.” 당시 박 조합원의 나이는 열아홉 살 이었다.

20여 일이 지나고 사직서를 쓰면 내보내준다는 말에도 절대 내 손으로 사직서를 쓸 수는 없다고 버텼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그곳에 끌려온 다른 노조 조합원들도 내보내주지 않겠다는 얘기에 결국 사직서를 쓸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출근했는데 회사에서 사직서를 썼으니 더 이상 자기네 직원 아니라면서 출입을 막았죠. 조합원들은 만나야겠으니 시장에서 이것저것 사다가 회사 후문에서 리어카 장사를 시작했어요.” 그때 만난 이들과 학습 모임을 꾸려 공부를 했고, 그들이 이후 한일도루코노조 집행부를 맡기도 했다. 당시에 공부를 같이 한 사람 중에는 현재 박 조합원의 남편도 있었단다.

해고자로서 자신이 할 일은 거기까지라고 생각했다는 박 조합원은 이후 구로공단 다른 회사에 취업을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아무리 일을 잘해도 몇 달만 지나면 회사를 그만둬야했다. 기숙사에서도 내쫓겼다. 박 조합원은 당시에는 그게 블랙리스트인 줄도 몰랐다며 당시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20여 일의 고문, 국가가 빼앗은 일터 

2000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공표되면서 박 조합원의 삶은 또 다시 전환점을 맞았다. “구로공단에서 같이 활동했던 분이 해고된 노동자들도 대상자가 된다고 하더라구요. 20년 만에 한일도루코 조합원들이 모여서 민주화 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아래 민보상위)에 신청하게 됐죠.” 민보상위는 한일도루코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박 조합원은 “민보상위에서 인정받으니까 ‘아, 노동자도 민주화 운동가구나’하는 자부심이나 자신감이 생겼다”고 당시 심정을 말했다.

민보상위에서 회사에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된 이들에 대해 복직시킬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회사는 ‘전두환한테 가서 따져라’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단다. “그래 좋다. 국가가 탄압하고 폭력 휘두른 것이니 국가가 해결하도록 해야지.” 이 생각으로 청계피복, 원풍모방, 동일방직 등 당시 탄압받고 해고된 사업장 10곳의 노동자들이 모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진정을 넣었다. 박 조합원은 “그곳에서도 국가가 정책적으로 민주노조를 말살시킨게 맞다고 인정했어요. 그걸 계기로 위로금 지급하라고 민사소송을 제기했다”며 “1심 판결이 나왔는데 대부분 국가 잘못과 위로금 지급하라고 승소 판결이 났다”고 설명했다.

▲ 1980년 전두환 정권 당시, 권리를 외치고 노조활동을 한다는 것이 어느 때보다 만만치 않던 때였다. 박 조합원은 1980년 12월 어느 날 조사할 것이 있다며 회사로 찾아온 이들에게 끌려가 20여 일 동안 말로 다 할 수 없는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다. “육군본부로 끌려가서 군복으로 갈아입히고 얼마나 때렸는지 몰라요. 불법감금에 폭행, 협박까지. 그래도 노조 위원장 어딨냐고 묻는데 우리 위원장 다치는게 싫어서 밥도 굶다시피하면서 묵비권으로 버텼죠.” 당시 박 조합원의 나이는 열아홉 살 이었다. 신동준

그것이 계기가 돼 해고무효확인소송을 진행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동료들한테 얘기한건 나는 복직하고 싶고, 금속노조 조합원 되는게 소원이라는 거였어요. 때가 왔다고 생각했고 더는 뒤도 안돌아보고 싶었어요.” 진정서를 넣고 소송을 진행한 것도 위로금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에 노동자들의 정당한 목소리, 노조를 탄압했던 것이 국가에 의한 폭력이었다는 것 확실히 인정받고 싶었다.” 회사는 현재 이름을 ‘도루코’로 변경하고 용인, 시흥 등에 공장을 두고 있다. “기숙사에 들어가든, 집을 얻든 꼭 복직해서 회사 다닐 것”이라고 말하는 박 조합원의 의지가 그대로 느껴진다.

“금속노조 조합원으로 ‘초지일관’ 살아보렵니다”

17살에 시작한 노동운동이 어느새 30년이 넘었다. 박 조합원은 그 세월동안 “노동착취 없는 세상, 세상을 바꾸는 것은 바로 우리 노동자다. 사회 변혁의 중심에 노동자가 서야 한다”는 것을 몸소 체득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스스로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 늦게나마 금속노조에 가입한 것이기도 하다.

“예전 노조 사무실에 ‘초지일관’이라는 글이 써있었어요. 그걸 보면서 나도 그런 마음으로 평생을 살고 싶다고 다짐했었죠. 사람답게 사는게 뭔지 처음으로 깨닫고 그걸 내가 직접 행동했던 기억은 결코 잊혀지지 않거든요. 노동자가 주인되는 세상, 그걸 만들면서 끝까지 초지일관으로 사는 모습, 작지만 나부터 보여주고 싶었어요.”

박 조합원은 “예전에 집회 나오면 금속노조 조끼 입은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웠어요. 조합원들이랑 같이 어울리면서 지금 느끼는 행복감을 계속 느끼고 싶다”며 “조합원으로서의 의무 열심히 하겠다”고 의지를 내비친다. 얼마 전 ‘쌍용차 정리해고문제 해결을 위한 4차 포위의 날’ 행사가 있던 날, 박 조합원도 인천지부 조합원들과 같이 참여했다. 평택으로 가는 버스에서 분향소 시민 상주단을 신청하라는 얘기를 듣고 제일 먼저 이름을 적었단다. “지난주에 서울 대한문 분향소에 시민 상주로 다녀왔어요. 방명록에 ‘금속노조 인천지부 조합원’이라고 적는데 얼마나 뿌듯했는지 몰라요.”

“많이 힘든 때죠. 하지만 낙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희망은 우리가 스스로 찾고 만들어야죠. 어려움이 있다면 우리가 극복하고, 운동의 중심에 노동조합이 설 수 있도록 힘냅시다.” 후배 노동자들, 이제 금속노조 하나의 울타리 안 동지들에게 박 조합원이 전하는 인사다. ‘초지일관된 노동자의 뚝심’으로 금속노조 조끼를 입고 당당히 현장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 박 조합원도 그렇게 희망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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