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께였을 게다. 오랜만에 점심이나 하자며 여의도에서 만난 MBC의 한 PD는 식당으로 가는 도중 길에서 마주친 아주머니들이 나누어주는 전단을 싫은 기색 없이 모두 받아들고 있었다. 한겨울, 빼곡하게 들어선 빌딩들 사이로 불어오는 강바람. 누가 만 원쯤 내민다면 모를까, 어지간하면 주머니에 넣은 손을 절대 빼고 싶지 않은 날씨였다.

횡단보도 앞, 수북해진 전단들을 들고 있느라 새빨개진 그의 손을 바라보고 있자니 겸연쩍은 듯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작년 겨울과 여름, 파업을 했었잖아요. 선전전을 하며 전단을 나눠줄 때 흔쾌히 받아주는 사람들이 그렇게 고맙더라고요. 그때 이후 길에서 전단을 나눠 주시는 분들의 손을 도저히 외면하기 어려워졌어요.”

이내 잊혔던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건 이날 후배가 꺼낸 하나의 장면 때문이었다. 이 후배는 최근 전국언론노조 KBS본부(이하 KBS 새노조)의 ‘리셋원정대’ 동행 취재를 다녀왔다. 낙하산 사장 퇴진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고 있는 KBS 새노조의 조합원들은 이명박 대통령 대선 특보 출신 사장 임명 이후 훼손된 공영방송 KBS의 실태와 공정방송 회복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오로지 두 발에만 의지해 얼마 전까지 전국을 돌았더랬다.

▲ 3월30일 파업중인 전국언론노조 KBS본부를 대표하는 '리셋원정대'가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퇴근시간에 맞춰 쌍용차지부 조합원들과 선전전을 하고 있다. 이들은 3월13일부터 4월5일까지 23일 동안 전국을 걸어 상경하며 김인규 KBS사장 퇴진과 MB정권 언론장악을 선전했다. <프레시안> 제공
취재를 위해 이 여정의 일부를 함께 했던 후배 기자가 후일담처럼 꺼낸 얘기는 이렇다. “…처음엔 빗물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눈물이더라고요. 공영방송 기자인데도 지금까지 노동 이슈 등 사회의 소외된 부분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지금까지 자신의 모습에 대한 반성도 있었겠지만 날도 춥고, 비는 내리고, 다리도 아프고, 파업 참여에 따른 불이익에 대한 걱정 등 여러 가지가 섞인 눈물이 아니었겠냐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하지만 이 대화는 이내 앞서 언급한 2010년의 기억을 불렀고, 후배와의 대화에 등장한 그 기자의 눈물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언론을 흔히 사회의 공기(公器)라 부른다. 사회 구성원 전체가 이용하고, 그렇기에 공공성을 띠어야만 하는 것이 바로 언론이다. 언론인의 시선이 사회의 구석을 향해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현실에서 언론은 공복(公僕)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이란 이름으로 더 친숙한 입법·행정·사법부와 함께 부정적 의미의 ‘제4부’로 분류되는 일이 더 많아 보인다.

그리고 언론인도 사람인지라, 자신과 맞닿은 이런 세상에 쉽게 익숙해지곤 한다. 1990년대 초 신도시 아파트 건설 붐 당시를 배경으로 한 어느 소설에서 왜 갑자기 수도권 교통 혼잡에 대한 대책을 촉구하는 기사들이 많아졌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 후 ‘기자들이 신도시로 이사를 하면서 출·퇴근길 교통 체증에 시달리기 때문’이란 답을 내놓은 것처럼 말이다.

공정방송 회복과 낙하산 사장 퇴진을 요구하는 방송·언론사들의 파업이 길게는 벌써 두 달을 훌쩍 넘기고 있다. 그러나 하루가 멀다 하고 파업에 참여하고 있는 언론인들에 대한 징계와 해고 소식이 들려올 뿐, 낙하산 사장들이 물러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4·11 총선에서 여당이 예상 밖으로 선전하면서 권력지형도, 변화의 기회 역시 미뤄진 상태다. 또 대선 과정에서 낙하산 사장들의 전횡이 문제가 된다 하더라도 현 정권이 집권 초기 정연주 전 KBS 사장을 위법 해임했던 것과 같은 수준으로 대응할 순 없는 일인 만큼, 현재 언론인들의 싸움은 기실 녹록치 않다. 때문에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작금의 싸움 속 언론인들은 더 많은 고통과 희생을 감내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 고단한 길 위엔 ‘리셋원정대’에 참여한 KBS의 기자가 흘렸다는 한 줄기 눈물이, 한 겨울 매서운 바람에도 전단을 나누어주는 아주머니들의 외면하지 못해 새빨개진 MBC PD의 손이, 각성(覺醒)처럼 쌓이지 않을까.

물론 그렇게 쌓인 각성도 일상으로 돌아가면 또 다시 무뎌질 수 있다. 그러나 한 번 저려진 배추는 아무리 물에 헹궈도 처음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법이다. 아, 전제가 하나 있긴 하다. 지금 푸른 기와집의 주인인 어떤 이처럼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위험만 입버릇만 경계한다면 말이다.

김세옥 / <PD저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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