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만 년 전의 모습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어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불리는 동물, 산양.

암벽화의 고무창 같은 발바닥으로 바위를 잘 타며 한번 사는 곳을 정하면 그 자리에서만 잠을 자고 똥을 누는 자기 영역 밖을 거의 벗어나지 않는 동물이다. 깍아지른 절벽이 많은 바위산에 주로 서식하고 있지만 원래는 해안가 가까이 낮은 지대에서도 살던 동물이었다. 개발로 서식지가 파괴되고 사람들의 간섭과 포획이 늘어나자 점점 서식지를 이동해 이제는 암벽이 산양의 대표적인 서식지처럼 되어버렸다.

우리나라에서 산양은 멸종위기야생동식물 1급이자 천연기념물 제217호로 지정되어 있고 설악산 일대와 울진, 삼척, DMZ 등지에서 주로 서식한다. 특히 울진․삼척은 최대 산양 서식지로 알려져 있다. 최대 서식지인 울진 일대에선 눈이 녹고 날이 풀리는 이맘때 즈음엔 겨울동안 굶주렸던 산양이 먹이를 찾아 산 아래로 내려온다. 서식지를 거의 벗어나지 않는 산양에겐 이례적인 일이다.

주둥이로 눈을 파헤치는 산양은 눈이 많이 쌓이면 먹이를 구하기 쉽지 않다. 지붕까지 눈이 쌓여 울진에선 70년만의 폭설이었다는 2010년은 아마도 산양에게 최악의 시기였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해 2월부터 6월까지 모두 25마리의 산양이 산 아래 계곡에서 탈진하거나 죽은 채 발견되었다. 원인은 모두 굶주림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탈진한 채 발견되어 구조되었던 산양도 결국은 모두 죽었다는 것이다. 구조는 신속하게 이뤄졌지만 구조 직후 산양을 치료하고 돌보는 시스템이 전혀 갖춰지지 않았던 것이다.

▲ 산양은 멸종위기 1급종이자 천연기념물 217호로 지정돼 있다. <산양보호협회> 제공

지역의 천연기념물 치료병원이라는 곳은 산양을 눕힐만한 공간도 없을 만큼 열악해 종이박스 위에다 산양을 눕혀보는 것 말고는 아무런 처치도 할 수 없어 구조된 산양들은 차로 한 시간 거리의 인근 지역의 전문병원으로 옮기다 폐사하고 말았다. 야생동물 전문 수의사가 없어 서울에서 연락을 받은 수의사가 급하게 내려와 치료하는 도중 폐사한 경우도 있었다.

2010년 당시 25마리의 산양이 떼죽음을 당한 뒤 정부가 한 일은 1년에 한 번 먹이주기 행사를 하고 임시계류장을 만들고 설악산 국립공원에 있는 종복원센터의 수의사가 구조된 산양을 치료하도록 하는 것이다. 최소한의 응급처치를 할 수 있는 인력도 없는 임시계류장이 과연 쓸모가 있는지는 물을 필요도 없고 울진에서 설악산까지는 3시간 가까이 걸리는데 그곳의 단 한명 뿐인 의사가 울진 산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정부가 이렇게 무대책에 가까운 대책을 내놓는 동안 민간에선 모금으로 마련된 무인카메라 15개를 산양 서식지 주변에 설치해 산양을 모니터링 하고 있고 눈이 녹는 시기엔 꾸준히 산양의 이동지역을 돌며 산양을 구조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모두 자원봉사로 이뤄지는 일이다.

날이 풀리는 요즘 또 울진에서 산양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네 마리의 어린 산양이 구조되었지만 그 중 한 마리는 인근 가축병원에서 치료 도중 폐사했고 나머지는 종복원센터로 옮겨졌다. 세시간 거리의 종복원센터로 이동하는 도중 죽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산양전문가와 통화해 응급처치를 하면서 속초와 울진의 중간기점인 동해고속도로 입구에서 서로 만나 산양을 인계했다고 한다.

시간이 조금만 지체되었으면 나머지의 산양도 모두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 이뤄진, 마치 영화의 작전 같은 구조소식이었다. 무사히 구조되어 다행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이번 상황을 보더라도 정부가 대책이라고 마련한 게 근본적인 대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야생동물의 세계에서 삶과 죽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인간의 간섭으로 인해 서식지를 뺏겨 멸종위기에 처해있고 천연기념물로까지 지정된 동물이라면 최소한의 보호 장치가 있어야 하는데 잡으면 가벼운 벌을 받는 정도의 법 말고는 아무런 보호 장치가 없는 산양. 그나마 국립공원 같은 보호지역 내의 동물은 전문 인력에 의해 보호받고 있지만 울진 ·삼척 같은 곳은 최대서식지임에도 법적인 보호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민간에 의해 보호받는 것 말고는 대책이 없다.

산양을 구조했던 울진에서 산양보호활동을 하는 이들은 요즘 2010년의 악몽이 또 되풀이될까봐 걱정스럽다고 한다. 깊은 계곡의 눈이 녹기 시작하는 요즘, 울진에서 산양 구조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그저 운이 좋기만을 기대하는 것이 천연기념물이자 멸종위기동물에 대한 유일한 대책인 것은 아닌지 안타깝기만 하다.

정명희 / 녹색연합 정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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