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10년. 경기 안산 자동차 시트 생산업체인 대원산업에서 이른바 ‘민주노조’가 안정화되기까지 걸린 기간이다. “노조를 만들었을 때, 웬만한 탄압은 나름 각오했어요. 하지만 교묘하고 집요한 노조 무력화 공작이 더 무서운 건 줄은 몰랐죠.” 13일 안산 대원산업지회 사무실에서 만난 정승권 조합원이 대원산업 노조 역사를 소개하기에 앞서 한 말이다.

대원산업에 노조가 생긴 건 뜨거웠던 87년 여름. 당시 대원산업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비인간적인 대우에 시달렸으며, 여성 노동자들은 관리자의 성희롱까지 감내해야 했다. 억눌렸던 분노는 ‘6월 항쟁’ 직후 전국에서 들불처럼 번진 노동자 대투쟁 때 폭발했다. 대원산업 노동자들은 노조를 만들며 파업을 시작했다. 경찰병력이 출동했지만 노동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화염병을 준비한데다, 공장 출입구 근처에 화학물질이 많아 경찰은 함부로 침탈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 달여간 옥쇄파업 끝에 8월 10일 대원산업노동조합이 건설됐다.

한 달간 옥쇄파업하며 노조 설립

“파업 몇 개월 전에 입사했는데, 너나할 것 없이 나서는 분위기였어요. 처음으로 최루탄까지 맞아가며 다들 열심히 싸웠죠. 이웃 섬유공장 여성 노동자들이 기숙사에 갇혀 있다는 소식 듣고 구출투쟁을 벌인 적도 있어요. 우리 공장뿐 아니라 지역 곳곳에서 들고 일어나니까 이게 대세구나 싶었죠.” 정 조합원이 당시를 떠올렸다.

▲ 정구양 대원산업안산지회장은 "민주노조와 어용노조의 차이는 누가 집행부가 되느냐 보다 어떤 자세로 어떻게 노조를 운영하는냐에 따라 갈린다"고 말한다. 김상민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노조 설립을 막지 못한 회사는 노조 무력화로 전략을 바꿨다. 회사는 공수특전단 출신을 대거 입사시켜 현장 분위기를 경색시켰다. 그리고 이들이 88년 8월 노조 선거에 나와 대원산업노조를 ‘접수’한다. 노조 건설 1년 만에 현장엔 ‘어용노조’가 들어섰다. “공수특전단 출신들이 노조를 맡은 뒤 조합원들은 이들이 무서워 노조 사무실에 얼씬도 못했습니다. 현장에서 폭행이 다반사였어요. 엄혹한 분위기였죠.” 정 조합원은 당시엔 노동자들이 이들에 정면으로 맞설 만큼 준비돼 있지 않았다며 이 같이 말했다.

그렇다고 노동자들이 숨죽이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어용노조 2년 동안 현장에는 노조 민주화의 뜻을 품은 노동자들이 암암리에 모여 스스로 힘을 키웠다. 그리고 1990년 6월 경선으로 치룬 노조 선거에서 이들이 내세운 후보들이 출마해 과반 이상을 득표했다. 그런데 당시 선관위가 느닷없이 이들의 당선 무효를 선언해 버렸다. 투표용지에 도장이 조금이라도 제대로 찍히지 않은 경우 무효표로 간주해 과반 이상을 득표한 후보가 없다고 우겼다.

“너무 억울해 현장에서 기계를 붙잡고 1시간 울었어요. 자본이 얼마나 치사할 수 있는지, 그들의 본질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정 조합원은 당시 확실한 증거는 못 찾았지만 다들 회사가 노조 선관위를 매수했기에 벌어진 일로 여겼다고 말한다. 회사는 노노갈등으로 치부했지만, 분노한 조합원들은 회사에 분노를 표출했다. 작업을 거부하고 식당에서 단식농성을 벌였다. 회사는 이를 빌미로 후보로 나섰던 조합원 세 명을 해고하고 투쟁에 동참한 조합원들에게 무더기 징계를 남발했다.

기계 붙잡고 1시간 눈물 흘린 사연

“당시 많은 조합원들이 징계를 감수하고 함께 싸웠어요. 민주노조에 대한 열망이 뜨거웠다는 증거죠.” 정구양 대원산업지회장이 당시 분위기를 설명했다. 이 싸움은 결국 재선거로 결론 났다. 해고자들은 차기 집행부가 복직투쟁을 책임지기로 했다.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지만 재선거가 단독선거로 치러지면서 기존 어용 세력으로부터 노조를 탈환할 수 있었다.

▲ 정승권 조합원은 잘나갔던 최근 15년보다 힘들었던 10년의 노조 역사가 더 소중한 경험이라고 말한다. 김상민

하지만 이대로 민주노조가 정착된 것은 아니었다. 새 위원장은 당선 1년이 지나자 태도를 바꿨다. 해고자 복직투쟁을 저버린 데다 임단협에서 직권조인을 하고 도망갔다. 이 사건 역시 배후에 회사가 있었다던 게 분명해 보였다. 분노한 조합원들은 또 회사를 상대로 싸웠다. 1주일간 파업을 벌였다. 당연히 경찰 병력이 출동했다. 정 조합원을 비롯해 4명이 구속됐다.

탄압 속에서 92년 출범한 4대 집행부도 비슷한 전철을 밟았다. “당시 저를 비롯해 구속됐던 이들이 부위원장직을 맡았는데, 몇 개월 뒤 석방돼 현장에 복귀하고 보니 집행부가 또 회사 회유에 넘어가 있더라고요. 참담했죠.” 정 조합원 등 당시 부위원장들이 집행부의 잘못을 현장에 폭로하자 위원장은 도리어 이들을 징계위에 회부해 노조에서 제명시켰다. 이들이 믿을 건 조합원들밖에 없었다. 현장 조합원들은 집행부의 잘못된 처사에 반발했다. 결국 불신임 분위기가 높아지자 회사와 결탁했던 사람은 아예 회사를 그만뒀다.

이후 계속된 투쟁 속에 제명됐던 조합원들은 복권됐다. 대원산업노조는 전노협에도 가입한다. 하지만 정 조합원은 “이후에도 90년대 중후반까지 회사의 노조 흔들기는 계속됐다”며 “노조가 설립된 87년 이후 10년이 지나서야 민주노조가 나름 안정화 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대원산업노조는 97년 민주노총에 가입했다. 그 뒤 노조는 2001년 금속노조 대원산업지회로 조직형태를 변경한다. 지회는 금속노조 가입 후 수년 동안 임금인상 요구안을 100% 관철시키는 등 노동조건을 많이 향상시켰다. 최근 몇 년간 물량이 줄어든 것 빼고는 큰 현안는 없다. 노사관계도 지난 15년간 대체로 원만하게 이어져 왔다.

▲ 정구양 대원산업안산지회장이 25년 노조 역사가 담긴 사진첩을 꺼내 보여주고 있다. 김상민

그런데 정 조합원은 최근 15년보다 그 이전 힘들었던 10년의 경험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밖에서 보기엔 우리의 10년이 그다지 내세울 것 없는 역사겠죠. 하지만 우리에게는 다릅니다.” 힘겨웠던 당시 10년을 되돌아보면 어떤 생각이드냐는 질문에 정 조합원이 힘주어 말했다. “당시 어용세력이 노조를 잡거나 믿었던 집행부가 어용 짓 할 때, 항상 우리 조합원들이 바로잡아줬어요. 이렇게 고맙고 소중한 경험이 어디 있겠습니까.”

“힘들었던 옛 10년이 더 소중해”

“조합원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유혹에 흔들리지도 않고 노조 사업도 자신감 있게 추진할 수 있죠. 힘든 기간이었지만 10년 동안 우여곡절 겪으면서 얻은 교훈입니다.” 정 조합원은 최근 일부 사업장에서 금속노조를 탈퇴하거나 어용노조가 생기는 일이 많아지는 것도 이 같은 원칙을 지키지 않아서일 수 있다고 분석한다. 조합원들 두려워할 줄 모르고, 조합원들 믿지 못하니까 회사의 회유에 흔들리곤 한다는 것.

정구양 지회장이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민주노조와 어용노조의 차이는 누가 집행부가 되느냐 보다는 어떤 자세로 어떻게 노조를 운영하느냐에 따라 갈립니다. 별로 자랑할 것 없는 역사를 가진 지회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 금속노조는 현재 약 2백 40개에 달하는 지회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조직의 규모가 크건 작건, 역사가 길건 짧건 많은 곳들이 치열한 투쟁을 겪으면서 노동조합을 지키고 발전시켜왔습니다. 우리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담고 있습니다. <금속노동자>는 노동조합 활동과 노동운동 과정에서 소중한 경험을 간직한 조합원들을 찾아 우리 지역, 우리 사업장의 이야기를 듣고자 합니다. 이번에는 다섯번째 편입니다. 본 기획은 계속 연재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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