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깨닫지 못한다면, 유사한 역사가 반복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리 멀지 않은 30년이 채 안되는, 아니 당장 1년 전의 일인데도 애써 외면하거나 의미를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가 그렇다. 1986년 4월 26일과 2011년 3월 11일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에서 발생한 핵발전소 폭발 사고가 주는 교훈을 우리는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TV를 켜면 이라크, 아프카니스탄 등 세계 곳곳에서 아이들이 전쟁으로 다치고 죽어가는 화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스쳐지나간다. 그들이 받는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체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전쟁을 방조할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서 전쟁의 악순환이라는 고리를 끊어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후쿠시마 주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체르노빌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겪고 있는 고통을 체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핵발전소의 위험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작년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터지고 우리가 물었던 질문들을 수정하지 않는 한 우리 스스로 또 다른 후쿠시마, 또 하나의 체르노빌이 될 수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르게 질문해야 한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나에게, 내 아이에게 어떤 피해를 가져오는가라는 질문을 버리고,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로 그 지역 주민들의 삶이 어떻게 바뀌고 어떤 고통을 어떤 피해를 당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하며, 그들의 삶을 나의 삶으로 체득해야 한다.

▲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나에게, 내 아이에게 어떤 피해를 가져오는가라는 질문을 버리고,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로 그 지역 주민들의 삶이 어떻게 바뀌고 어떤 고통을 어떤 피해를 당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하며, 그들의 삶을 나의 삶으로 체득해야 한다. <자료사진>
전쟁에서 영웅이 있듯,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영웅들도 있었다. 쏟아지는 포탄 속에서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무고한 시민들을 구해낸 전쟁의 영웅처럼, 쏟아지는 방사선을 온몸으로 맞으며, 방사선으로부터 무고한 시민들을 구해냈다. 그런데 그들은 알고 있었을까? 자신들이 방사선 피폭으로 생명이 단축된다는 사실을. 자신들의 고통이 자식들에게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만약 우리나라에서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난다면, 우리는 핵발전소 노동자들의 희생을 통해 더 큰 피해를 막아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며 지금의 안락함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까?

핵산업계 사람들, 핵발전소 전문가들이 이야기 한다. 우리나라 핵발전소는 다르다고, 안전하다고. 그렇다. 그들의 말처럼 우리나라 핵발전소는 안전하다. 일본사람들이 후쿠시마 핵발전소는 체르노빌과 다르다고 얘기했듯이. 핵발전소를 설계할 때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예측하고 그 상황에 맞게 안전성을 담보한다. 그래서 예측한 시스템 아래서 100% 안전하다. 그런데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체르노빌과 후쿠시마가 그 답을 말해주고 있다.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설계대로 예측한 상황을 막을 수 있게 핵발전소가 건설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둑용접이라 불리는 사건이 그러했고, 잘못된 재료인지 알면서도 부식이 잘되는 재료를 경제적 이윤을 고려하여 그대로 사용하여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핵발전소의 현실이다.

마지막 질문 하나. 핵발전소 사고에 대비해 무수한 훈련을 반복한다. 그 훈련 과정에서 냉각수 공급이 끊기고 2~3시간이 지나면 노심용융이 일어난다고 가정하며 대처한다. 그런데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냉각수 공급이 한나절 이상 끊긴 것을 인지하였음에도 전 세계 핵산업계 사람들, 핵발전 전문가들은 당시 최악의 상황인 노심용융이 발생했다는 것을 몰랐을까? 몇 개월이 지난 뒤에야 알았다는 그들의 거짓말을 우리는 모른 척 넘어가야 할까? 우리의 미래를 전문가에게 맡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답은 우리 스스로 내려야한다. 탈핵의 길은 멀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의외로 가까울 수도 있다. 그 첫 걸음은 더 이상 핵발전소를 짓지 않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정명희 / 녹색연합 정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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