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무대. 머릿속이 하얘진다. 박수소리, 함성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어이쿠, 게다가 연습했던 게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음악이 시작되니 거짓말처럼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천 동광기연지회 율동패 ‘비상’ 패원인 최영진, 신혜경 조합원이 지난해 말 대우자동차판매지회 해고 조합원들 앞에 섰을 때의 경험이다.

▲ 동광기연지회 율동패 '비상' 조합원들은 율동연습 전에 지난 활동 평가와 노동 관련 현안에 대해 토론한다. '비상' 조합원들이 인천공항 관세청 하청노동자들이 휴대전화 문자로 해고 당한 내용이 나온 유인물을 보고 있다. 신동준
“관중이라고 해 봤자 50여명밖에 안됐는데 첫 공연이라 그런지 너무 긴장됐어요. 그래도 음악에 따라 몸이 움직이는 걸 보니 연습이 중요하긴 한가 봐요.” 10일 동광기연지회에서 만난 최 조합원이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비상’ 패원 4명은 몸진선언 정은진 강사를 모시고 주 1회 율동연습을 한다. 이날도 연습이 있는 날이다.

연습에 임하는 이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기름때 묻은 작업복 차림이지만 몸짓이 예사롭지 않다. “노래 한 곡으로 길게는 아홉 개월씩 연습합니다. 공연이 가까워지면 정해진 연습 날이 아니어도 모이죠. 야간근무를 빼거나 주말을 반납하기도 일쑤에요. 집에 가서도 가족들이 잠자는 밤에 혼자 거실에서 몸짓을 다듬어 볼 때도 있고요.” 율동패 패장인 최문회 부지회장이 패원들의 열정을 자랑한다.

▲ 동광기연지회 율동패 ‘비상’ 조합원들이 율동연습 전에 몸풀기를 하고 있다. 겨울철 율동 전에 몸풀기 강도는 더욱 강하다. 몸풀기는 부상방지를 위해 필수. 신동준
첫 공연의 기억

최 조합원과 신 조합원은 지난해 8월 율동패에 가입했지만, 최 부지회장과 전진억 조합원은 이미 수년간 율동을 해왔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역시 연습은 중요하다. 전 조합원이 부끄러웠던 경험을 소개한다. “예전에 콜트악기지회 조합원들 앞에서 공연한 적이 있어요. 그 때 준비된 공연을 다 마쳤는데 앵콜 요청이 온 거에요. 패장 형님이 감정이 앞서서 덥석 하겠다고 했는데 ‘개판’이 됐죠.” 연습 없이 마음만 너무 앞서서는 제대로 된 율동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이들 모두 이토록 열정적으로 연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연습이 된 다음엔 기술보다 감정이 오히려 더 중요하다는 게 이들의 지론이다. 최 부지회장은 “노래에 감정이 실리면 듣는 사람들이 더 공감하듯 노동자들의 율동에는 노동자의 감정을 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말은 진짜였다. “열사의 주검을 끌어안아 올린다는 느낌으로 해보세요. 복수의 표창이 날아가듯 팔을 쭉 피고 몸을 돌려보세요.” 이날 연습에서 몸짓선언 정은진 강사가 가사에 담긴 의미를 설명하면서 교정을 지시하자 다들 몸짓이 달라졌다. 몸짓 하나하나에 머리로만 외워 하는 율동에서 느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 동광기연지회 율동패 ‘비상’ 조합원들이 민중가요 한 곡 전체 율동을 맞춰 보기 전에 부분 동작을 연습하고 있다. 신동준
처음부터 ‘기술’보다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한 건 아니었다. “처음엔 기술만 배우면 율동이 되는 줄 알았죠. 그렇게 기술 익혀 공연하는 걸 동아리 활동의 전부로 생각하기도 했고요.” 율동패에서 ‘연습부장’ 역할을 맡을 정도로 실력이 좋은 전진억 조합원이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율동엔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었다고 고백한다.

지난 2005년 야심차게 시작한 율동패는 이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일부 회원들이 율동패 활동의 의미를 못 찾고 탈퇴하며 한 때 해산 위기까지 갔던 것. 비슷한 시기 함께 만들었던 풍물패와 노래패는 해산되기도 했다. 최 부지회장은 ‘내용’이 뒷받침되지 않은 ‘형식’이 얼마나 취약한지 뼈저리게 느꼈다.

▲ 동광기연지회 율동패 ‘비상’ 조합원들은 서로 부분 동작을 돌봐주며 보다 완벽한 동작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신동준
“내용없는 형식만으론 안돼”

2010년 금속노조의 재정지원 결정과 동광기연지회의 조직적인 노력에 힘입어 재기에 나선 ‘비상’은 활동 방식을 확 바꿨다. 매주 연습할 때마다 정세토론도 하고,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에 대해 고민을 나누는 시간을 가진다. 활동도 연습한 것을 지회 조합원들 앞에서 보여주는 공연보다 지역의 투쟁사업장에 연대하는 공연을 주로 한다. 신혜경 조합원은 “노조활동보다 율동패 활동하면서 배운 게 더 많다”고 말하기도 한다. 지회 교육선전부장이기도 한 신 조합원은 율동패 내에선 ‘연대사업부장’을 맡아 인천지역에서 연대가 필요한 현장에 대해 알아보는 일까지 하고 있다.

이 같은 활동으로 패원들은 ‘의식’이 쌓여갔고, ‘의식’은 이들의 율동에 담길 ‘감정’을 낳게 됐다. “예전과 달리 최근엔 율동을 통해 동지들에게 힘을 줄 수 있다는 걸 중요하게 여기게 됐어요. 그렇게 연대의 마음을 담으니 율동 자체가 달라지더라고요.” 전진억 조합원의 설명이다.

▲ 자, 이제 ‘비상’. 동광기연 율동패 ‘비상’ 조합원들이 민중가요 한 곡 전체에 맞춘 율동을 실전처럼 선보이고 있다. 신동준
고된 노동 후 몸 추스를 새도 없이 연습에 나서는 ‘비상’ 패원들. 마땅한 연습실도 없어 지회 사무실 앞 좁은 휴게실에서 연습하다보니 이리저리 몸을 부딪쳐 다치기도 한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에서도 몸짓 하나하나에 연대의 마음을 담고자 밤늦게까지 땀을 흘리고 있다. 이들의 바람은 별 것 없다. “우리 율동으로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기세를 북돋을 수 있으면 그걸로 만족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박수와 환호를 받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죠.”

* 공장 출퇴근 길 발걸음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해주는,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기계 부속품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모임. 바로 우리 지역과 현장에 있는 동아리들입니다. ‘우리 동아리를 소개합니다’는 <금속노동자>가 지역과 사업장에서 활동하는 각종 동아리를 소개하는 연재꼭지입니다. 전국에 자랑하고 싶은 동아리모임이 있으면 금속노조 선전홍보실(02-2670-9507)로 연락바랍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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