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전박살. 주말 저녁을 틈타 기세 좋게 공장을 ‘침탈’했던 용역과 구사대 수백명은 순식간에 불어난 조합원들 기세에 눌려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공장 한 구석에 고립됐다. 그리고 불과 몇 시간 만에 공장 밖으로 모두 쫓겨나야 했다. 지난 2006년 3월 11일 구미 한국합섬(현 스타케미칼)에서 벌어진 일이다.

▲ 차광호 스타케미칼지회장은 노조 운영에 있어 '머리나 논리'가 아닌 조합원 마음을 모으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김상민
“긴급 상황이 발생했다는 문자를 받은 후 한두 시간 만에 1, 2공장 각각 2백 명 넘게 모였죠. 해고자든 비해고자든 용역 몰아내지 못하면 다 죽는다는 각오로 목숨 걸고 싸웠어요.” 스타케미칼지회 사무실에서 만난 홍기탁 조합원이 당시 상황을 떠올린다. 용역과 구사대가 있던 건물 옥상에 올라가 쇠파이프로 쿵쿵 내려찍으며 ‘심리전’을 했던 일화, 노동자들이 벽을 해머로 부수고 들어가자 구사대들이 혼비백산했던 일화도 흐뭇한 표정으로 소개했다.

2006년 3월 11일 그 사건

홍 조합원을 비롯해 많은 지회 조합원들이 가장 뿌듯하고 승리적인 기억으로 꼽고 있는 역사가 바로 이날이다. “철저하게 준비했기에 그토록 치열하게 싸울 수 있었죠.” 홍 조합원은 당시를 회상하며 이 같이 강조한다. 비슷한 시기 국내 섬유업계 불황으로 코오롱을 비롯한 많은 동종업체에서 인력구조조정이 자행되고 있었다. 특히 한국합섬의 경우 부실경영으로 부채가 늘어 정리해고가 뻔히 예상됐던 상황. 이미 2005년 하반기부터 공장가동률이 현저히 떨어지기도 했다.

이에 지회는 2005년부터 일찌감치 조합원들과 소통하며 회사의 공격에 대비했다. 정리해고 발표가 난 이후엔 주말을 빼고 조합원들이 순환하며 공장을 지켰다. 그래서 회사는 지회 간부들만 공장에 남아있던 토요일 저녁을 공격 날짜로 택했다. 공장을 ‘접수’하면 설마 주말 저녁에 조합원들이 감히 쳐들어오겠냐는 계산이었다.

노동자들은 회사의 계산이 오판이었음을 증명했다. 용역과 구사대를 쫓아내고 공장을 되찾은 노동자들은 회사의 수차례 침탈 위협에 맞서며 굳건하게 공장을 지켜냈다. 그리고 그해 9월 회사로부터 공장재가동과 정리해고 철회를 약속받았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회사는 결국 운영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공장 재가동에 실패하고 만다. 2007년 2월 회사는 파산했고, 전 조합원이 해고자 신세가 됐다. 그리고 2010년 7월 스타플렉스가 한국합섬 공장을 인수하면서 고용 및 단체협약 승계를 약속하기 전까지 고난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2007년 회사파산 뒤 고난의 세월

5년의 세월은 너무도 길었다. “회사가 파산해버리자 많은 이들이 희망을 버리고 떠났죠. 동료들이 하나 둘씩 줄어드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이석범 조합원은 “사람을 잃는 것보다 큰 고통은 없다”며 지난 5년을 가장 괴로웠던 시기로 꼽았다. 2007년 파산 결정 이후 조합원 4백여명 중 2백여명이 떠났다. 그리고 2009년엔 1백여명 수준으로 줄었다.

▲ 이헌기 조합원은 96년 파업 당시 구사대 쪽에 있었다. 하지만 2006년엔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정리해고 반대 투쟁에 앞장서게 됐다. 김상민
생계문제 해결이 급해 떠난 이들. 가정불화를 못 견뎌 떠난 이들. 남아 있는 사람도 겪는 아픔이었기에 붙잡기 힘들었다. 가정이 없었던 조합원도 고통은 마찬가지. 이 조합원은 “저를 비롯해 당시 결혼 적령기였던 조합원 상당수가 시기를 놓쳐 아직까지 결혼도 못하고 있다”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괴롭기만 한 시간은 아니었다. 공장을 돌려 섬유원사를 찍어낼 순 없었던 노동자들은 다른 것을 대신 생산하며 희망을 키웠다. 공장 한 구석에 일군 텃밭, 웅덩이에 물워 채워 기른 오리와 닭, 토끼까지. “아마 공장에서 안 먹어본 고기가 없을 겁니다.” 차광호 지회장이 “공장은 조합원들의 투쟁의 장이자 가족들까지 즐겁게 함께할 수 있는 공동체의 공간이 됐다”며 당시를 회상한다.

언제 공장이 다시 돌아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5년간 1백 여 명이 버텨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조합원들은 생계를 위해 일용직, 비정규직을 전전하면서도 짬을 내 일터를 지켰다. 돌아가지도 않는 공장을 뭐 하러 지키냐 묻는 이 있지만 그건 모르는 소리다. “우리가 5년간 공장을 사수하지 않았다면 복직은 불가능했죠. ‘자산’만 인수하기로 했던 스타플렉스가 고용과 단협을 승계하기로 한 것도 우리가 공장을 지키면서 실사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차 지회장의 설명이다.

차 지회장은 “과거 헐값에 내 놓은 공장 기계만 되팔아도 수백억원의 차익이 발생하는 현실이었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이들이 공장을 지킨 것은 기계가 팔리게 되면 일터로 돌아갈 마지막 희망이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청춘을 바친 일터를 빼앗는 건 도둑이나 다름없다. “일터의 주인이 노동자인 만큼 도둑놈들로부터 우리 공장을 지키는 게 당연한 거죠.” 차 지회장은 이 같이 말하며 실제 공장에서 쓰이는 물품을 훔치던 도둑을 붙잡았던 일화까지 소개했다.

‘도둑’으로부터 공장 지킨 일화

그렇다면 과연 5년 동안 1백여명이나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아마 머리로 하는 투쟁이었다면 이렇게 못 버텼을 걸요.” 이헌기 조합원이 “서로를 격려하며 마음을 따뜻하게 하면서 투쟁했기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며 자신의 경험을 소개했다. 얘기는 이 조합원이 입사한 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국노총 소속이었던 한국합섬노조는 96년 4월 8일부터 무려 36일간 옥쇄 파업을 벌였다. 95년 말 조합원 2명이 산업재해로 사망했는데, 보상문제를 두고 회사와 이견을 좁히지 못한 것이 발단이었다. 파업 과정에서 경찰 폭력에 맞서 조합원 두 명이 분신하고, 이를 계기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공동투쟁을 선포하는 등 사회적으로는 2006년 싸움보다 더 큰 투쟁이었다.

▲ 지난해 7월 한국합섬HK지회(현 스타케미칼지회)가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산업은행의 일방적 공장 자산 매각 방침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김상민

“노조는 빨갱이 집단인줄 만 알았다”는 이 조합원은 당시 구사대쪽에 서 있었다. 그리고 투쟁 이후에도 이 조합원은 수년간 노조와 담을 쌓고 살았다. 그런데 2000년 12월 이 조합원이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가는 일이 생겼다. 이 조합원은 산재인정을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노조가 이 조합원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이 조합원은 노조가 자신을 위해 헌신적인 애썼다는 사실을 병간호하던 이 조합원의 형에게 한 참 뒤에야 듣게 됐다. “얘기를 듣고 나서 지금까지 내가 노조를 잘 못 알고 있었구나 싶어 펑펑 울었어요. 그 때부터 노조를 대하는 태도가 180도 바뀌게 됐죠.”

회사편에 섰던 이가 돌아선 사연

이 조합원은 5년 넘게 병치레 하다 2006년 정리해고 반대 투쟁이 벌어지기 직전 공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간부들이 결사투쟁을 결의하며 삭발식을 할 때 함께 머리털을 밀었다. “결혼도 안 했으니 위로금이나 산재보험금 받으면 회사에서 일 안 해도 살만 하죠. 회사를 떠나는 게 스스로 생각해도 이성적인 판단이었어요. 일을 다시하고 싶어 복귀한 게 아닙니다. 어떻게든 노조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에 공장으로 돌아온 거죠.” 그렇게 ‘머리’가 아닌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공장에 돌아온 이 조합원은 곧바로 5년간 장기투쟁에 함께했고, 지금도 노조 활동에 열심이다.

차 지회장은 노조 운영에 있어서도 ‘머리나 논리’가 아닌 조합원 마음을 모으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조합원들이 스스로 마음먹고 준비하지 않는 투쟁은 백프로 진다고 봐야합니다. 반대로 조합원 마음이 모으면 반드시 이깁니다. 96년 36일 파업 때도 그랬고, 2006년 용역들을 몰아낼 때도 그랬어요. 그리고 우리가 5년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공장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옷을 만들려면 천이 있어야하고, 천을 짜려면 실이 있어야 한다. 스타케미칼 노동자들은 옷을 만드는 가장 첫 단추인 실(화학섬유 원사)을 생산하는 일을 하고 있다. “실 한 올은 잘 끊어지지는 약한 존재지만, 한 올 한 올을 엮어 옷을 만들면 튼튼하죠? 노조도 똑같습니다.” 스타케미칼지회 조합원들이 청춘을 바쳐가며 몸으로 느낀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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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케미칼지회 붉은 조끼의 의미는?

한국합섬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든 것은 지난 94년. 당시 한국노총 소속이었던 한국합섬노조는 96년 4월 36일 간 파업투쟁을 경험하면서 민주노조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이듬해 한국합섬노조는 민주노총 소속 전국민주화학섬유노동조합연맹에 가입했다. 그 시절 이후 한국합섬 노동자들은 투쟁 때마다 붉은 조끼를 입어왔다.

▲ 23일 지회 사무실에서 만난 홍기탁 스타케미칼지회 조합원이 2006년 공장에서 용역과 구사대를 몰아낸 투쟁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김상민

지회는 2009년 금속노조 가입 후 다른 금속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짙은 남색 조끼를 마련했다. 금속노조 집회에는 이 조끼를 입고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지회 내에서는 붉은 색을 고수하고 있다. 물론 조끼에 새겨진 글씨는 금속노조다.

차광호 지회장은 이에 대해 “단순히 눈에 잘 띄는 색깔이라는 것 외에도 한국합섬 시절 투쟁의 역사를 되새기자는 의미가 있다”고 설명한다. 특히 차 지회장에 따르면 2010년 스타플렉스가 회사를 인수해 2011년 스타케미칼로 새 출발을 하면서 과거 구사대 쪽에 있었던 사람들까지 회사에 재입사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지회는 회사가 언제든 다시 칼을 뽑아들고 노조탄압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붉은 조끼는 이런 회사에 대해 지회 조합원들이 과거처럼 언제든 투쟁에 나설 수 있다는 경고의 의미다. 지회는 올해 3월 생산이 재가동된 이후 사내에서 다시 붉은 조끼를 착용했다. 최근 회사는 복지비 지급, 결원인원 충원 문제 등에 있어 지회 의견을 묵살하고 있기도 하다.

붉은 조끼는 지난 세월을 투쟁으로 극복해온 조합원들에게 있어 일종의 자부심이다. 이헌기 조합원은 “붉은 조끼는 우리에게 아직 ‘한 방’이 남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라며 “이 조끼를 입으면 죽어도 그냥 죽지 않겠다는 결의가 생긴다”고 말한다.

* 금속노조는 현재 2백40여개에 달하는 지회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조직의 규모가 크건 작건, 역사가 길건 짧건 많은 곳들이 치열한 투쟁을 겪으면서 노동조합을 지키고 발전시켜왔습니다. 우리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담고 있습니다. <금속노동자>는 노동조합 활동과 노동운동 과정에서 소중한 경험을 간직한 조합원들을 찾아 우리 지역, 우리 사업장의 이야기를 듣고자 합니다. 이번에는 두번째 편입니다. 본 기획은 한달에 한편씩 연재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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