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은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 건설된 지 20년이 되는 해이다. 노동자들은 1987년 7, 8, 9월 노동자대투쟁으로 전국에 민주노조를 뿌리내리고, 1988년부터 지역, 업종, 그룹별로 단결의 폭을 확대해 나갔다. 그 힘을 바탕으로 전노협은 1990년 1월 22일 군사독재정권의 입체적인 포위를 뚫고 ‘민주노조 총단결과 산별노조건설’을 위한 과도적 조직으로 건설되었다. 전노협에는 600여 노조, 20만 명의 조합원, 14개 지노협, 3개 업종협의회가 참여했다.

▲ 1990년 피로 쓴 '노동해방'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하는 단병호 위원장과 조합원들.

‘전노협’이라는 이름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필자에게는 전노협 시기 노동자이 외쳤던 ‘노동해방’이라는 구호다. 노동해방이란 구호가 등장한 것은 1985년 말 즈음으로 보인다. 일부 노동자들이 부른 노래 중에 하나가 ‘노동해방가’였다. 아래는 그 가사의 일부다.

강제와 감시 속에 우울하고 고통에 찬
죽음의 고역 같은 노동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고 기쁨에 찬 빛나는 노동쟁취
동지여 두려움 없다 역사는 우리의 것

군사정권시기,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속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민주노조를 세우는 것조차 어려웠던 시기, 노동자들의 바람이 담겼다.

‘노동해방’이 전국 노동자들의 가슴과 머릿속에 선명하게 자리 잡은 날은 1988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정신계승 및 노동악법개정 전국노동자대회’였다. 전국의 노동자들이 한 자리에 가장 많이 모인 이날 대회장은 “철폐하자 노동악법” “노동운동 탄압하는 군부독재 타도하자!” “열사정신 계승 노동해방 쟁취하자!”는 구호가 가득 찼다. 선봉대로 나선 노동자들이 손가락을 깨물어 하얀 광목 천 위에 ‘노동해방’이라는 붉은 글씨를 쓰면서 투쟁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자본가와 투쟁한다는 사실만으로 끈끈한 연대의식

전노협을 건설해낸 노동자들은 ‘노동해방’이라는 구호 안에 어떤 바람과 생각을 담았을까. 전노협은 강령에 “노동자의 처지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사회경제구조의 개혁과 조국의 민주화 ․ 자주화 ․ 평화통일을 앞당기는데 기여 한다”고 했고, 1990년 3월 중앙위원회에서 전노협 핵심구호를 ‘평등사회 앞당기는 전노협’으로 천명하기도 했다. 완화된 표현이지만 ‘노동자의 처지의 근본적 변화’나 ‘평등사회’라는 표현 속에는 이 자본주의 사회를 구조적으로 변화시키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었다.

물론 현장의 노동자들은 ‘노동해방’이라는 구호 속에 노동시간 단축, 저임금해소, 인간적 대우와 작업장의 민주화, 착취와 억압을 강요하는 자본주의 사회를 뒤집는 것 같은 저 마다의 여러 바람을 담았던 것 같다.
여러 바람의 차이에도 모두가 같이 외쳤던 ‘노동해방’이라는 구호는 이 시기 커다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우선 ‘노동해방’은 노동시간단축, 임금문제와 단체협약, 산업재해, 고용안정 등 수많은 사업장 안의 문제로 투쟁을 벌이던 노동자들이 ‘따로 같이’ 자본가들과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서로 끈끈한 연대의식과 노동자로서의 일체감을 담아 표현한 것이다. 또 ‘노동해방’에는 당면한 투쟁의 요구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바람과 꿈을 전노협과 민주노조운동을 통해 실현시키겠다는 신뢰와 의지가 모아진 것이었다. 곧 노동해방은 단순히 구호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꿈을 노동자들의 연대성과 전노협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실천하겠다는 의지의 상징이었다.

이런 신뢰를 바탕으로 전노협은 전노협사수투쟁, KBS방송노동자와 현대중공업 골리앗투쟁을 지원하고 민주노조운동을 사수하기 위한 1990년 5월 총파업투쟁, 한진중공업 박창수 위원장의 옥중살인규탄 및 노동운동탄압에 맞선 1991년 5월 총파업을 벌였다. 전노협은 소속 ‘조합원’의 이익과 요구만이 아니라 업종, 대공장 노동자들과 민주노조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연대투쟁을 실천하였다. 그 결과 전노협은 민주노조 총단결을 만들어 1995년 민주노총과 산별노조건설의 바탕이 되는 역사적 역할을 다했다.

▲ 1990년 노동자들이 전노협 깃발을 앞세우고 서울 시내에서 가두투쟁을 벌이고 있다.

사라진 ‘노동해방’ 구호

노동자 역사를 보면 시대마다 노동자들은 노동운동이 처한 역량에 따라 자신들의 꿈과 바람을 담아 표현했다. 전태일 열사와 1970년대 민주노조의 노동자들은 ‘인간답게 살고 싶다’를 표현 속에 그들의 지향을 담았고, 1980년대 노동운동은 ‘사회변혁’을 지향했으며 그것의 다른 표현이 ‘노동해방’ 이었다. 이런 지향들이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 전노협시기 노동자들의 요구로 모아진 것이다.

그런데 1990년 중반 이후 ‘노동해방’이란 구호가 사라졌다. 현실의 노동자들이 무엇을 같이 꿈꾸는지 표현되지 않고 있다. IMF이후 절실한 당면 문제는 고용불안과 비정규직 문제를 해소하는 것이며 노동악법들을 개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용안정을 통해 현재의 노동자생활을 지켜내는 것, 비정규직은 정규직이 되는 것, 노동악법을 개정해서 민주노조운동을 하는 것’, 이것이 우리 노동자의 궁극적인 바람이고 꿈인가. 현실의 노동자들이 다음 세대 노동자가 될 자녀들에게 물려주려는 것이 ‘정규직으로 노동하는 사회’ 인가.

그렇지 않지만 현실투쟁조차도 버겁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꿈과 지향이 없는 민주노조운동은 현실에서 노동력 판매조건을 둘러싼 줄다리기에 매몰될 뿐이다. 그러나 그 투쟁에 ‘노동자가 주인 되는 사회’에 대한 꿈과 열망을 담아 진행할 수 있다면, 노동자 사이의 일체감을 높여 나가면서 새로운 사회에 대한 디딤돌을 놓는 일이 될 것이다.

2010년 새해 첫날 국회에서 복수노조와 전임자임금지불 문제를 둘러싸고 노동법이 다시 날치기로 개악되었다. 민주노총은 악법개정투쟁과 총파업투쟁을 선언했다. 그 투쟁의 힘은 현장에서부터 조직되어야 하지만, 투쟁의 기운을 세워나갈 때, 그동안 움츠러진 노동자들이 가슴을 펴고 그들의 꿈을 다시 담아 갈 수 있는 시작이 되었으면 좋겠다.

유경순 /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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