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여당인 한나라당이 국회 본회의장을 기습 점거하고 비공개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을 날치기 처리한 지난 11월 22일, 지상파 방송 3사의 저녁 뉴스가 끝날 즈음 시사평론을 업으로 삼고 있는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예상은 했지만 심하지 않냐.” 다짜고짜 그가 건넨 첫 마디였다. “KBS MBC SBS 메인뉴스를 일부러 챙겨 봤는데 ‘날치기’는 기대도 안 했지만, 어떻게 ‘강행’이란 표현을 쓴 곳조차 없다.”

실제로 이날 KBS <뉴스9>와 MBC <뉴스데스크>, SBS <8뉴스>는 여당의 한미FTA 날치기 소식을 하나 같이 ‘전격처리’, ‘전격 통과’라는 표현으로 전했다. 날치기. 네이버 국어사전에 따르면 법안을 가결할 수 있는 의원 정족수 이상을 확보한 당에서 법안을 자기들끼리 일방적으로 통과시키는 일을 의미한다. 전격. 여러 뜻이 있지만 이 경우엔 ‘번개같이 급작스럽게 들이침’이란 의미의 전격(電擊)일 터다.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한미FTA 비준동의안의 국회 처리와 관련한 상황에선 ‘전격’ 보다는 ‘날치기’가 적확함을 알 수 있지만, 방송뉴스는 일제히 그 표현을 피했다.

▲ 본회의장 왼편 기자석 출입을 통제하던 경위들과 들어가려던 야당 당직자들이 몸싸움을 벌이다 출입문 유리가 깨졌고, 그 사이를 통해 기자들이 아슬아슬하게 들어가고 있다. <미디어오늘>
KBS <뉴스9>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갔다. 여당이 비공개로 한미 FTA 비준동의안을 날치기한 사실도 전하지 않은 것이다. 비공개로 본회의를 진행한다는 것은 영상기록은 물론 속기록조차 남지 않음을 의미한다. 야당 당직자들이 본회의장의 문을 부숴 기자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본회의장 안의 야당 의원들이 스마트폰으로 현장 상황을 촬영해 방송·언론에 제공하지 않았더라면 “을사늑약 이후 최초의 조약 날치기” 현장은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는 장면이 될 수도 있었다.

더구나 한미FTA 비준안은 국민 생활에 직결되고 이행법안만 23개나 돼 ‘헌법에 준한다’는 평가를 받는 초대형 조약이다. 그런 조약의 날치기 현장이 비공개 됐음에도 방송, 그것도 국민의 수신료로 운영되는 KBS에선 이를 문제 삼기는커녕 비공개 사실조차 시청자인 국민에게 알리지도 않은 것이다. 연예인 사생활을 파파라치 하면서도 언론이 당당하게 내세우는 ‘국민의 알 권리’가 여당의 한미 FTA 비준동의안 비공개 날치기에선 왜 등장조차 못하는 것일까.

연예인 사생활은 ‘알 권리’ 내세우면서

필자는 한미FTA 비준동의안 비공개 날치기 처리 다음날인 지난 11월 23일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의 기자간담회 발언 속에 방송-언론이 ‘비공개’와 ‘날치기’를 금지 단어로 설정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국회가 몸싸움장이 되고 아수라장이 되는 것이 국내-해외 방송에 나가는 건 적합하지 않고, 그걸 노리는 (야당의) 일부가 있어 비공개로 했다.” 여당에선 지난 2004년 한나라당의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 이를 저지하던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울부짖으며 끌려 나가던 장면이 방송을 통해 생중계되고, 직후 진행된 총선에서 참패했던 악몽의 재연을 우려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초기의 정기간행물들은 대중을 정치적 결정에 참여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때문에 저널리즘의 역사는 언론이 정당에서 공공의 이익으로, 충성의 대상을 변화시키는 과정 속에서 발전해 왔다. 하지만 현 정부 출범 이후 대통령과 친분을 자랑하는 이들이 공영방송의 수장에 잇달아 임명되면서 저널리즘의 역사는 퇴행하고 있다는 게 방송-언론인들 공통의 지적이다.

실례로 전국언론노조 KBS본부의 엄경철 본부장(기자)은 지난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열린 선거방송 보도점검 토론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측은 우리에게 ‘너희들은 왜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가. 선거(대선)에서 지지 않았나’라고 말한다.” 즉, ‘선거에서 승리한 정권(정부)=공익’이란 프레임을 당연시함에 따라 대통령(정부)과 여당의 문제는-민감한 사안일수록-비판 불가능의 영역으로 남겨지고 있는 게 작금의 방송-언론의 현실인 것이다.

때문에 시청자 국민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방송-언론이 여당의 한미 FTA 비준동의안의 비공개 날치기 처리를 “한미 FTA 비준동의안 전격 처리”라고 전할 때, 자신의 알 권리가 이들에 의해 날치기 당하고 있음을 말이다. 참고로, 날치기에는 ‘남의 물건을 잽싸게 채어 달아나는 도둑’이라는 뜻도 있다.

김세옥 / PD저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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