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어짜인 중산층(squeezed middle). 옥스퍼드 영어사전 편집진이 선정한 올해의 단어다. 전 세계적 경제위기가 지속되면서 물가상승과 임금동결, 공공지출 삭감 등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된 중간 이하 계층을 의미한다. 지난해 12월 튀니지에서 시작돼 이집트 등 북아프리카와 중동을 휩쓸고 있는 민주화 운동을 지칭하는 ‘아랍의 봄(Arab Spring)'을 2위로 밀어냈다. 이 용어가 선정됐다는 것은 저소득층은 물론이고 그나마 살만하다고 여겨졌던 중산층 삶조차 벼랑 끝으로 내 몰리고 있다는 현실의 반증일 것이다.

쥐어짜인 중산층은 양극화의 또 다른 표현이다. 날이 갈수록 중산층 자체가 크게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빈곤층이 중산층으로 올라가기는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 되어가고 있다. 반면, 물가상승에다 실질소득 감소로 빈곤층으로 추락하는 중산층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우리나라도 중산층 붕괴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다.

쥐어짜인 중산층하면 선뜩 떠오르는 대상이 민주노총 조합원들이다. 아직은 정규직 노동자로 생활에 큰 불편을 초래하지 않을 만큼의 일상을 유지하고 있지만, 언제쯤 이 일상이 파괴될지 전전긍긍해야 하는 상황이다. 전세방을 전전해야 하는 고달픈 삶에서 벗어나고자 무리하게 대출 받아 산 아파트도 걱정이다. 살길은 재테크 밖에 없다는 생각에 무리해서 투자한 주식이나 부동산도 걱정이다. 더욱 큰 걱정은 자본이 언제 어느 때 구조조정이라는 명목으로 나를 내 몰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쥐어짜인 정규직 노동자라 할 만하다.

▲ 우리 노동자들은 재테크의 함정에 빠져있다. 하지만 재테크는 자본이 만들어 논 환상에 불과하다. 우리 노동자들이 진정으로 고민해야 할 것은 재테크가 아니다. 쥐어짜인 정규직 노동자의 사회적 역할을 다시금 새겨야 할 때다. <자료삽화>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 사태로 촉발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주범은 현실의 금융시스템 그 자체였다. 엄청나게 부동산 가격을 폭등시킨 것도, 과도하게 부채를 않고 그러한 부동산을 살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금융시스템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 금융시스템이 결코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나 민중들의 편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중들은 금융의 도움으로 주택을 구입할 수 있었지만, 그 주택을 아주 잠시 동안만 소유할 수 있다. 거품이 꺼지며 주택가격이 하락하는 그 순간부터 대출 원금을 갚지 못하게 됐다. 주택 소유권은 금방 금융기관 손으로 넘어갔다. 실제 미국에서 2008년 320만 건, 그리고 2009년에는 390만 건의 주택이 압류되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현실의 금융시스템이 민중편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쥐어짜인 정규직 노동자의 처지

▲ 필자
우리나라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해 말 797조원이었던 가계대출이 올 9월말 기준 이미 840조원을 넘어서는 등 가계부채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 이미 가처분소득 대비 부채비율이 150%를 넘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가세가 꺾이지 않고 있다는 점도 큰 문제다. 그동안 이자만 납입하던 주택담보대출의 원금상환 개시자가 점차 늘고 있다는 점도 위험을 증가시키는 요인이다. 원금상환 시점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채무상환부담이 갑자기 증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실위험이 커지게 된다. 올 한해 가계 빚 이자부담액만 50조원을 넘어서는 상황이다. 과다부채로 주택가격 하락 또는 금리상승 등의 충격이 발생하면 부실의 늪에 빠지게 된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노동자들은 재테크의 함정에 빠져있다. 정부도 기업도 나를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IMF 당시의 경험이 재테크로 표현되고 있다. 하지만 재테크는 자본이 만들어 논 환상에 불과하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모 증권사의 광고가 있었다. 가지고 있는 자산 모두 특정 주식에 투자하였다가 가격이 떨어지게 되면 모든 것을 잃게 될 경우를 경고하며 분산투자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이 광고가 생각 못한 것이 하나 있다. 일하는 노동자들 대개가 기껏해야 계란이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 노동자들이 진정으로 고민해야 할 것은 재테크가 아니다. ‘하나뿐인 계란을 자본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잘 지킬 수 있을까’란 가장 현실적인 고민에서부터 출발하자.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라면 누구나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 쥐어짜인 정규직 노동자의 사회적 역할이다.

이한진 / 진보금융네트워크 연구실장

* 필자소개 : 현재 전국사무금융노동조합연맹 부설연구소 진보금융네트워크의 연구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지금은 금융시스템이 자본의 사적 전유물에 불과하지만, 반드시 사회적 공공재화 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우리 일상생활의 구석구석까지 파고든 금융이지만, 금융의 금자만 나와도 고개부터 절래절래 흔드는 노동자들에게 보다 쉽게 금융경제 이야기를 전달하고픈 욕심도 가지고 있다. 앞으로 금융경제의 허와실을 금속노조 조합원들에게 연재하여 전해준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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