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포르투갈에서 이겼고, 그리스에서도 이겼고, 스웨덴에서도 이겼다.”

몇해 전 해외출장에서 만난 이탈리아 좌익민주당 청년당원이 내게 해 준 말이다. A매치 축구 얘기가 아니었다. 좌파의 재도약을 강조하면서 유럽의 선거소식을 전할 때 그는 분명히 ‘우리’(we)라는 주어를 사용했다. 아시아 변방에서 창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민주노동당’에 생각이 갇혀있던 동양청년은 그 푸른 눈의 좌익청년이 사용한 ‘전지구적 시야의 1인칭 복수 주어’가 매우 낯설었고 한편으로는 충격이었다.

아니, 그가 소속된 좌익민주당이 다른 나라까지 진출해서 정치를 했을 리는 없고, 하물며 유럽 사민주의 정당 사이에서도 다양한 노선과 입장의 차이가 있을 터인데 포르투갈의 사회당도, 그리스의 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당도, 스웨덴의 사회민주당도 모두 ‘우리’에 포함된다니!

솔직히 까놓고 말해 얘들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좌파 아니고 쟤들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우리’랑 다르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비행기 타고 돌아온 이 땅의 노동운동이나 진보정당 안에서조차 저 현장조직도, 저 당내정파도 ‘우리’에는 포함되지 않는 것 아닌가.

동아시아 사회주의의 기원, 고토쿠 슈스이

일본의 사회주의자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 선집 『나는 사회주의자다』(임경화 엮고 옮김, 교양인 펴냄)를 읽으면서 그때 받았던 문화적 충격이 새삼 떠올랐다. 백여년 전 일본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자 고토쿠에게 ‘우리’는 일본만이 아니라 조선, 중국 그리고 전세계의 사회주의자와 무산계급이었다. 그는 국경과 민족을 초월해 무산계급의 연대와 저항을 외친 국제주의의 주창자였다. 그의 주장과 활동은 1세기 전에, 그것도 유럽이 아니고 동아시아에서 나타났다고 믿기 어려운 스케일을 보여준다.

그는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사회당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애국주의와 군국주의는 그대들과 우리들의 공통의 적이다… 그대들과 우리들과 전 세계의 사회주의자는 공통의 적을 향해 용감하게 전투를 벌이지 않으면 안 된다”며 양국 최초로 반전운동을 주창했다.

또한 조선병탄론을 비판하면서 “조선 문제를 해결하는 표준은 조선 귀족 관리의 이해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평화와 행복에 있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조선 인민을 위하여 복리가 되는지, 동양 인류, 세계 인류의 문명을 위하여 유익한지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고토쿠는 1909년 10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의거를 기리는 그림엽서를 제작했다가 발매금지 처분을 받자 미국에서 다시 만들었는데. 1910년 ‘대역사건’으로 체포됐을 때 품에 간직하고 있던 이 엽서에는 그가 쓴 한시가 적혀있다.

死生取義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하고
殺身成仁 몸을 죽이고 인을 이루었네.
安君一擧 안중근이여, 그대의 일거에
天地皆振 천지가 모두 전율했소.

고토쿠는 『20세기의 괴물 제국주의』(1901)를 통해 신해혁명의 주역들을 비롯한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사회주의 신수』(1903)는 조선과 중국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고 『장광설』 (1902) 같은 저서는 조선의 신채호 등에게 깊은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는 천왕 암살을 모의하다가 사전에 발각된 이른바 ‘대역사건’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돼 1911년 열한 명의 동료들과 함께 사형 당함으로써 40년 짧은 생을 마감했다.

▲ 저자 고토쿠 슈스이.

‘우리’에 대한 역사적, 지구적 성찰

책을 읽으며 부끄러웠다. 백년 전의 고토쿠에 비해 우리는 시야도 좁고 사소한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 같다. 세계 노동운동이 한국을 주목한다고 우쭐대기만 했지 다른 나라 노동운동이 어떤지, 어떻게 연대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부족한 것 같다.

질문을 던져본다. 동아시아 사회주의의 뿌리였던 고토쿠의 삶은 우리의 역사일 수 있는가. 얼마전 지구 반대편 브라질 르노 자동차 노동자들이 이룬 승리는 우리의 승리일 수 있는가. 지금 방콕 교도소에 수감된 태국 노동운동가 소묫 석방운동은 우리의 투쟁일 수 있는가.

그리고 다시 눈을 돌려본다. 우리는 생각이 같은 ‘우리’ 안에서만 자족하고 있지는 않은가. 서로 얼마나 같은 기반 위에 서있는지보다 ‘어떻게 다른지’만 강조하고 있지는 않은가. 정파의 논리에 갇혀 전체 운동에 대한 고민은 놓치고 있지 않은가.

노동조합은 임원선거를 하고 있고 진보정당은 통합을 위한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다. 2011년 지금 이 땅에서 진보정당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책임감, 한국사회를 진보적으로 바꿔보고자 하는 사람으로서의 책임감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지는 가을이다. 이런 말 너무 거창할지 모르지만 역사적 좌파, 지구적 좌파로서의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넓은 ‘우리’가 어찌되든 말든, 좁은 ‘우리’의 원칙과 신념만 견결히 지키면 그만이 아니다. 그것으로 세상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다시 묻고싶다. 당신의 ‘우리’는 어디까지인가.

윤재설 진보신당 정책연구위원

저작권자 © 금속노동자 ilabo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