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친구한테 전해. 입조심 하지 않으면 쥐도새도 모르게 없애버리겠다고 말이야.”
6월 어느 날, 호세 우고 야니니는 자신의 핸드폰에 발신번호도 없이 찍힌 익명의 문자 메시지 한 통을 받았다. 핸드폰을 들고 있던 손이 저절로 떨리는 게 느껴졌다. 문자에서 말한 ‘그 친구’가 누구를 가리키는 건지, 그리고 그 문자가 무슨 의미인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야니니는 세계적인 레스토랑과 식음료 서비스 기업인 소덱소(Sodexo)의 콜롬비아 자회사에서 근무하는 직원이자 노동조합 간부였다. 그 날 그는, 노조를 대표해 사측과 단체협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고, 그가 받은 문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노조위원장과 간부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하기 위한 사측의 공작이었다. 그런데 그걸 단순한 구두 협박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중남미에 위치한 콜롬비아에서는 노동운동가들을 대상으로 한 폭력이 아주 만연해 있다. 핵심 간부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해 살해하거나 오토바이를 탄 괴한이 총을 쏘고 달아나는 수준의 심각한 사건들조차 이제는 지역신문의 단신으로 처리될 정도로 빈번하다. 1986년 이래로 그렇게 목숨을 잃은 노동운동가들의 수만 해도 무려 2천 8백 여 명. 사흘에 한 명 꼴로 살해된 셈이며, 그 중 야니니가 속한 노조의 조합원들도 스무 명이 포함돼 있다.

이런 죽음의 굿판은 작년 8월에 새로이 취임한 후안 마누엘 산토스 대통령이 취임 연설 때 테러를 근절하고 살인자를 처벌하겠노라 약속한 뒤에도 그칠 줄 모르고 있다. 당시 대통령은 “생명 존중은 신성한 원칙이므로 노동운동가를 비롯한 진보인사들과 시민들에 대한 테러를 확고하고도 흔들림 없이 근절하겠다”고 말했다. 지난 열 달 동안 살해된 노동운동가들이 35명이고 실종된 사람까지 합하면 42명이다. 작년 한 해 동안 콜롬비아를 제외한 전 세계에서 살해된 노동운동가 숫자인 41명을 능가한다.

▲ 중남미에 위치한 콜롬비아에서는 노동운동가들을 대상으로 한 폭력이 아주 만연해 있다. 1986년 이래로 그렇게 목숨을 잃은 노동운동가들의 수만 해도 무려 2천 8백 여 명이다. 용역깡패들이 노동자들을 향해 쇠파이프와 소화기를 집어던지고 차를 몰아 사람을 치어도 제대로 된 처벌조차 받지 않는 이 땅의 현실. 총만 안 들었을 뿐이지 다르지 않다고 느껴진다.
상황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살인자 검거와 처벌 비율은 말을 꺼내기도 민망할 정도다. 2005년부터 2008년 사이에 일어난 2백 36건의 노동운동가 살해사건 가운데 미제사건 비율이 98.3%에 달한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대부분의 사건이 우파 민병대(사실상 깡패들)나 보안군에 의해 저질러졌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기업과 정부, 그 중에서도 한국의 국가정보원에 해당하는 행정안전부(DAS)가 있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범인이 잡힐 수 없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처벌받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아는 깡패들이 더욱 더 대담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콜롬비아 노동운동가들이 처한 이런 비극적인 현실은 나라 밖, 특히 미국에서도 큰 논란거리다. 2006년에 미국과 콜롬비아 양국 정부는 양자간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기로 일찌감치 합의해놓은 상태인데, 바로 노동운동가 살해를 비롯한 노동인권 탄압이 결정적인 걸림돌이 돼 미국 의회 비준이 5년째 미뤄져오고 있다. 셔롯 브라운, 조지 밀러 같은 민주당 의원들뿐만 아니라 공화당 의원들 가운데 상당수도 노동인권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비준은 불가능하다는 태도를 고수해오고 있다.

그래서 오바마 대통령은 콜롬비아 노동인권 개선을 위한 ‘노동행동계획'까지 별도로 내놓았다. 하지만 미국노총인 AFL-CIO와 <미국 노동교육 프로젝트(USLEAP)> 같은 노동운동조직들은 그 내용이 너무 미흡하다며 지난 6월 중순 워싱턴 국회의사당 앞에서 “노동인권의 획기적 개선 없이는 FTA 절대 불가”를 외치며 시위까지 벌였다.

현재 미 의회에는 콜롬비아 이외에도 한국 및 파나마와의 FTA가 동시에 계류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과의 FTA에 관해서는, 외국 기업들과의 경쟁으로 일자리를 잃게 될지 모르는 미국 노동자들의 직업 재훈련 프로그램 지원과 생계지원 여부만 핵심쟁점이다. 한국의 노동인권 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않고 있는 셈다. 물론 미국 노동계와 의회가 콜롬비아의 FTA 체결을 위한 선결조건으로 노동인권개선을 요구한 데는 나름의 속사정이 있다. 관세 철폐로 인해 미국내 공장이 콜롬비아로 이전하게 되면 자국 일자리가 그만큼 줄어들 것을 염려한 탓이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한국 노동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열악한 노동인권상황이 FTA 비준논의 과정에서 아무런 주목조차 받지 못하는 상황은 안타깝다. 검은 옷에 방패를 든 용역깡패들이 노동자들을 향해 쇠파이프와 소화기를 집어던지고 차를 몰아 사람을 치어도 제대로 된 처벌조차 받지 않는 이 땅의 현실은, 총만 안 들었다 뿐이지 콜롬비아 노동운동가들이 처한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좀 더 분발해야겠다.

최재훈 / 국제연대단체 <경계를 넘어>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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