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산성터

1894년 농민전쟁 역사기행은 전라도 부안 백산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백산은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에 있다. 동으로는 김제 태인을 거쳐 전주로, 서쪽으로는 부안, 남쪽으로는 고부 정읍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에 있다. 서해안 고속도로 부안 나들목이나 호남 고속도로 태인 나들목에서 접근하기가 좋다. 백산은 높이가 47m 정도 밖에 안 된다. 실제 올라보면 배들평야와 김제 평야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백산은 1894년 1월 고부봉기를 일으켰던 주역들이 잠시 머물렀던 곳이며, 3월 20일 무장에서 기포한 농민군이 3월 25일 무렵 이곳에 진을 치고 조직체계를 정비했던 곳이기도 하다. 농민군 몇 천 명이 백산에 모였을 때, 앉으면 무기로 든 죽창이 숲 같고, 일어서면 흰 옷이 온 산을 뒤덮어 ‘서면 죽산이요 앉으면 백산’이라는 말이 상징처럼 붙어 다닌다.

꼭대기에 ‘동학혁명창의비’가 서 있다. 그 옆에서 나뭇가지 사이로 끝없이 펼쳐진 김제평야를 내려다보면서 조선시대 지주제의 모순을 떠 올리고, 그 시대의 농민군이 되어 평등세상을 꿈꾸어 보는 것이 백산에 보고 느껴야 할 핵심이다. 창의비 뒤쪽에 근래 지어놓은 정자가 있다. 그 위에 올라 다시 한 번 사방을 둘러보며, 서로 인사를 나누고, 1894년 농민전쟁의 역사를 개괄하여 설명하기에 마땅한 장소이다.

전봉준 장군 고택

정읍시 이평면 창내리에 있다. 백산에서 고부 정읍 쪽으로 내려가다 왼쪽으로 꺽어져 이평 쪽으로 가다보면 전봉준고택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보인다. 전봉준 고택은 낮은 산자락이 새둥지처럼 둘러싸고 있어 조소마을이라고 부르는 마을 복판에 있다. 이곳을 전봉준 생가라고 한 적도 있으나 전봉준이 태어난 곳은 고창 당촌이다. 여기저기 이사를 다니다가 태인 동곡에 살던 전봉준은 농민전쟁이 일어나기 몇 년 전에 이곳으로 이사와서 살았다.

1974년 해체 복원 공사를 할 때 상량문이 발견됨에 따라 이 집이 1878년 무렵에 지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고부농민봉기 때 불타다 남은 집을 그 뒤 보수하여 옛집의 형태가 살아 있다. 문제는 마당과 연견된 정원 같은 잔디밭이다. 잔디밭은 조선시대 조경양식도 아니었을 뿐 아니라, 원래 고택에 달려 있던 터도 아니었다.

말목장터

현재 정읍시 이평면 소재지인 두지리에 있다. 1894년 1월 고부농민항쟁이 시작된 곳이다. 말목장터는 부안, 태인, 정읍 가는 길이 만나는 삼거리에 있으며, 옛 장터는 현재 복지회관 자리이다.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킬 때 주로 모였던 시간과 공간은 장날 장터였다. 고부봉기도 마찬가지였다. 말목장터에 모인 농민들은 고부관아로 바로 처들어가지 않고 풍물패를 앞세워 인근 마을을 돌면서 더 많은 농민들을 모았다. 사람 수를 늘여 다시 말목장터에 모인 농민들은 죽창으로 무장하고 고부관아를 향했다. 음력 1월 10일이었다.

말목장터 삼거리 옆 공터에는 1894년 70살 쯤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던 감나무가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이 감나무는 2003년 8월 25일 태풍 매미가 지나갈 때 밑동이 부러져 쓰러졌다. 감나무 옆에 정자를 세우고, 복지회관 쪽으로 옮기고 하는 과정에서 밑동이 상해 버티질 못한 것이다. 지금은 그 자리에 새로 심은 감나무가 자라고 있다. 쓰러진 감나무는 뿌리 자르고 가지 잘라낸 채 몸뚱어리만 박제로 만들어 황토현에 있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보관하고 있다.

역사기행 하루 일정에서 점심은 주로 말목장터에서 먹게 된다. 미리 예약을 해두는 편이 좋다. 장소나 음식 맛으로 보아 새장터회관이 점심 한 끼 때울 만하다.

만석보터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진 만석보터는 현재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에 있다.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동진강 상류 쪽이다. 만석보터 안내판 왼쪽으로는 배들평야가 펼쳐져 있고, 뒤쪽 제방 끝 멀리 가물가물 백산이 보인다. 1894년에는 지금 보이는 제방은 없었다. 강과 논 사이에는 갈대밭이 있었다.

원래 정읍천에는 가물어도 물을 댈 수 있을 만큼 큼직한 만석보가 있었다. 그런데 1893년 고부 군수 조병갑이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그 아래에 또 보를 쌓았다. 홍수가 나면 물이 불어 위쪽 논에까지 피해를 주었다. 첫해에는 물세를 받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이를 어기고 그해에 물세를 걷었다. 1893년 11월과 12월 전봉준, 정익서, 김도삼이 앞장서서 물세를 감면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쫓겨나고 말았다.

1894년 1월 10일 말목장터에서 출발하여 고부관아를 점령한 농민들은 발걸음을 돌려 이곳으로 몰려와 새로 쌓은 보를 부숴버렸다. 만석보터로 추정되는 곳에 1973년 동학혁명기념사업회에서 세운 기념비가 있다. 한글로 ‘만석보터’하면 알아듣기 편할 터인데, 한자로 쓰려다보니 ‘萬石洑址’라고 어색하여 萬石洑遺址碑라고 이름을 새긴 비다.

황토재 유적

정읍시 이평면 도계리에 있는 황토재는 해발 35미터의 낮은 구릉지로서 진등 또는 ‘사자봉’이라고 부른다. 1894년 4월 7일 농민군이 전라도 감영군과 보부상에 맞서 싸워 크게 이긴 곳이다. 1894년 4월 6일 농민군의 유인책에 말려든 전라도 감영군은 해질 무렵 황토재에 이르렀다. 감영군이 있는 북쪽은 낮은 지대이고 농민군이 매복해 있던 사시봉 쪽은 높았다. 7일 새벽 농민군 진영을 밝히고 불빛이 가운데만 남기고 꺼졌다. 감영군은 농민군이 잠든 줄 알고 기습을 하였다. 농민군은 퇴로를 차단하고 양쪽에서 감영군은 협공하였다. “관병과 보부상군은 다 죽어버리고 살아 돌아간 자는 불과 수십 명이 되지 못하였다.”거나 “감영군은 수천 명이 죽고 살아남은 자는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하였다”고 전할 정도로 농민군이 크게 이겼다.

황토재에는 기념관이 두 개 있다. 하나는 2004년에 개관한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고 또 하나는 건너편이 있는 ‘황토현전적기념관’이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1층 ‘19세기 조선과 자각하는 농민들’부터 2층 ‘농민들이 꿈꾼 세상’까지 14개 방으로 나누어져 있다. 벽에 작은 글씨로 써 놓은 설명문은 자세하기는 하나 역사기행 과정에서 꼼꼼이 다 읽기에는 시간이 벅차다.

황토현전적기념관은 전두환 정권 때 역사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기념관 바깥 쪽 문을 넘어 들어가면 마당 왼쪽에 1987년 10월 1일자로 세운 ‘황토현전적지정화기념비’가 서 있다. ‘전두환 대통령의 유시(諭示)’로 역사 유적지를 정화하였다는 비문 끄트머리의 이름 석 자는 돌로 찧어져 있다.

사당의 형태를 모방하여 공간을 구분한 마당을 지나 중문을 넘어서 맨 뒤 쪽에 전봉준 장군 동상이 서있다. 5.6미터 되는 높은 화강암 받침대 위에 청동으로 주조한 동상 높이가 2.7미터이다. 격문을 들고 외치는 전봉준 장군 동상 머리가 맨상투이다. ‘압송당하는 전봉준’으로 알려진 사진을 바탕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죄수 머리가 되었다.

동상을 조각한 김경승은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시기 선전에서 입선 특선한 경력을 지니고 있다.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 4월혁명으로 쓰러진 이승만 동상, 친일 행적이 있는 고려대 김성수 동상, 이화여대 김활란 동상, 인천 송도중학교의 윤치호 동상도 그가 만들었다. 그런 경력을 지닌 김경승이니 농민군 지도자 전봉준 장군의 형상을 제대로 만들 수가 없었을 것이다.

황토현전적기념관은 역사를 제대로 배울 수 있는 장소라기보다는 오히려 역사가 어떻게 왜곡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념관이며, 기념사업을 이렇게 벌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교훈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기념관 언덕 꼭대기에는 1963년 ‘갑오동학혁명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가 세운 ‘갑오동학혁명탑’이 있다. 농민군 투쟁의 승리를 기념하여 세운 최초의 조형물이다. 탑은 좌우의 보조 석물 중간에 육중한 화강암 기둥이 수직으로 세워진 형상이다. 남성중심적이며 궈위적이고 위압스런 기념탑이다.

1894년 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이 위아래 양반 상놈으로 엄격하게 나누는 상하 수직의 신분 질서를 깨트리고, 서로 대등한 인간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꿨다. 그렇다면 조형물도 좌우 대칭의 중심에 수직으로 우람하게 선 조형의 상보다 수평의 형상으로 농민군의 뜻을 담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고부 관아터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에 있는 고부초등학교 자리가 고부관아터이다. 조선시대 전라도에서 전주 다음으로 컸던 고부군이 지금은 정읍시와 고창군, 부안군으로 나뉘어져 있다. 고부봉기 때 말목장터에서 출발한 농민들은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옥문을 부순 뒤, 죄수들을 풀어주었다. 군기고를 열어 무장하고 창고를 열어 조세곡으로 거두어 들인 곡식을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악질 향리들은 징벌하였다. 그 다음 몰려 간 곳이 만석보터였다. 지금 고부관아의 흔적은 볼 수 없으나 고부초등학교 옆에 고부향교가 남아 있어 옛 자취를 알려준다. 역사기행 때 일정이 빠듯하면 고부관아터는 슬쩍 들러 봐도 되겠다.

고부 신중리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

1994년 농민전쟁 100주년을 맞아 정읍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가 주축이 되어 세운 탑이다. 관 주도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시민단체와 뜻있는 지역 주민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것이다. 1893년 11월 농민군 지도자들이 ‘혁명’을 모의했던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녹두회관 앞에 세워졌다.

고부관아가 있던 고부초등학교를 둘러보고 정읍을 향해 1.9Km쯤 가다 입석리에서 오른쪽 중앙교회 가는 길을 따라 2.3Km 더 가면 주산마을이 나온다. 마을 입구 왼쪽에 1969년 사발통문 작성자 후손들이 세운 ‘동학혁명모의탑’이 있다. 마을 안쪽으로 이전했다 다시 원래 자리로 옮겨 세우는 과정에 전에 없던 무궁화 모양이 새겨진 계단이 한층 더 생겼다.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의 가운데 주탑은 '無名東學農民軍慰靈塔'이라고 이름을 새긴 받침대 위 네모난 화강암 판에 쓰러진 동료를 일으켜 감싸 안고 죽창 들고 외치는 농민군 모습을 얕게 파서 새겼다. 80년대 민중판화와 걸개그림의 양식을 빌었으며, 1987년 6월 9일 최루탄 맞아 쓰러진 이한열 학생의 모습에서 이미지를 따왔다고 한다.

토막토막 따로 세운 1-2미터 크기의 32개 보조탑에는 ‘밥이 하늘이다’를 상징하는 밥그릇, 무명농민군의 얼굴, 농민들이 무기로 썼던 농기구를 새겼다. 화강암 돌기둥 위, 아래, 중간에 새긴 농민군 머리는 표정과 거칠기를 달리하여 삶과 죽음을 표현하였다.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은 주탑을 중심으로 보조탑들을 따로따로 세운 까닭은 그 사이로 가까이 다가가 돌아다니면서 자세히 들여다보고, 안아도 보고, 손으로 쓰다듬어 보라고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이다. 역사를 좀더 생생하게 느껴보도록 한 배려이다.

그런데 보조탑 어느 기둥에도 농민전쟁에 참여했던 여성들과 아이들의 모습은 없다. 모두 어른 남자 머리뿐이다. 육중한 수직의 탑이 아니라 높이를 낮추고 펼치면서 가깝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들었으나, 아직 남성중심, 어른 중심의 시각에 머물고 있다는 뜻이다. 1894년 농민전쟁 역사기행을 하루 일정으로 잡았다면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 앞에서 마무리하게 된다. 1박 2일로 잡았으면 고창 선운사 부근에 숙박지를 잡는 것이 좋다.

박준성 / 노동자 역사 <한내> 연구위원

* 필자는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이야기』,『슬라이드 사진으로 보는 노동운동사』,『역사현장을 찾아서』(공저),『바로보는 우리역사』(공저) 등의 책을 썼으며 현재 역사학연구소 연구원, <역사와 산> 고문, 노동자교육센터 부대표, <작은책> 편집위원, 노동자 역사 <한내> 연구위원 등을 맡고 있습니다. /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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