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조직, 왠지 낯익다. 20년 전 딱 한 번 고시엔 대회(甲子園大會, 고시엔 구장에서 매년 봄과 여름에 열리는 일본의 전국고교야구대회) 16강에 진출한 게 고작인 만년 하위팀. 고시엔 대회에 나가기 위해 야구를 하는 게 아니라 그저 고교 시절 추억을 만들기 위해 운동을 하는 선수들. 연습은 자율적으로(?) 빠져도 되고 서로에 대한 불만이 쌓여도 대놓고 말하지 않는 소통불능의 조직.

『만약 고교야구 여자 매니저가 피터 드러커를 읽는다면』(이와사키 나쓰미 지음, 동아일보사 펴냄)이라는 긴 제목의 소설에 나오는 도쿄 도립 호도쿠보고등학교(이하 호도고) 야구부 얘기다.

일본에 ‘피터 드러커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이 소설에 대해 얘기하자면 우선 생소한 ‘고교야구 여자 매니저’와 ‘피터 드러커’를 먼저 알아봐야 한다. 미국 야구에서는 감독을 매니저라고 부르지만 일본 고교야구나 대학야구에서 ‘매니저’는 연습과 시합의 준비, 진행, 뒷정리와 스코어 기록 등 일종의 주무 역할을 하는 여학생을 의미한다. 그리고 피터 드러커는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로 1974년 『매니지먼트』라는 고전적 저서를 썼다.

야구부란 무엇인가

이야기는 이렇다. 갑작스럽게 야구부 매니저가 된 평범한 여고생 미나미는 ‘야구부를 고시엔 대회에 진출시키겠다’는 얼토당토않아 보이는 목표를 세우고 ‘매니저’와 ‘매니지먼트’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어느 서점 점원으로부터 소개받은 피터 드러커의 『매니지먼트』라는 책을 읽고 그 책에 나온 내용을 하나씩 야구부에 적용시키면서 이 엉망진창의 팀을 정말 확 바꿔버린다.

▲ 책표지. 표지 그림만 보고 여학생 매니저가 나오는 야한 만화로 착각하지 않기 바란다(필자강조).
미나미가 먼저 던진 질문은 바로 ‘야구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드러커에 따르면 매니지먼트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조직에 대한 정의’부터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야구를 하기 위한 조직’이라는 뻔한 답이 있지만 뻔한 답은 대체로 옳은 답이 아니다.

조직을 정의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질문은 ‘고객은 누구인가’다. 드러커는 이렇게 얘기했다.
“기업의 목적과 사명을 정의할 때, 출발점은 단 하나뿐이다. 바로 고객이다. 사업은 고객에 의해 정의된다. 사업은 회사명이나 정관, 설립 취지서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회사의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입하여 만족을 얻고자 하는 고객의 욕구에 의해 정의된다. 고객을 만족시키는 일이야말로 기업의 사명이고 목적이다. 따라서 ‘우리의 사업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기업 외부, 즉 고객과 시장의 관점에서 보아야 비로소 답을 찾을 수 있다.”

고객이 원하는 건 ‘감동’

그렇다면 영리단체가 아닌 고교 야구부의 고객은 누구인가. 고교야구와 관련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야구부의 고객이다. 즉 학부모, 선생님, 학교, 지역주민, 고교야구연맹, 전국의 고교야구팬들 그리고 야구부의 구성원이자 가장 중요한 고객인 부원들도 야구부의 고객이다.

그리고 고교 야구부의 고객이 원하는 것은 바로 ‘감동’이다. 봉황기, 청룡기, 황금사자기, 동대문야구장, 선린상고, 천안북일고, 군산상고, 광주일고, 경북고, 부산고, 박노준, 김건우… 하면 떠오르는 것 역시 ‘감동’이다.

미나미는 우선 부원들의 현실, 욕구, 가치를 끄집어내기 위해 면담을 실시한다. 마케팅은 고객의 현실, 욕구, 가치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독, 다른 매니저, 선수들의 장점을 살리고 야구를 하고 싶게끔 만든다.

야구를 재미없게 하는 것들

미나미의 노력으로 호도고 야구부는 조금씩 실력이 늘어갔지만 고시엔 대회에 출전할 정도는 아니다.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해온 방식을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것을 시작할 필요가 있었다. 바로 경영학이 말하는 혁신(이노베이션)의 과제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미나미는 기존 고교야구를 모두 진부한 것으로 보고 무엇이 낡고 진부한 것인지를 파악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감독과 미나미가 야구를 재미없게 만드는 것으로 꼽은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보내기 번트. 주자만 나가면 무턱대고 보내기 번트를 하기 때문에 창조성이 없는 시합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아웃카운트 하나를 내주는 결과 치고는 효과가 약하고 실패할 가능성도 크다.

정확한 지적이다. 롯데 자이언츠 팬들이 제리 로이스터 전 감독에게 열광한 것은 아무리 1점이 중요한 경기라도 웬만해선 번트를 대지 않고 강공을 하는 야구에 반했기 때문이다. 그 팬들이 양승호 현 감독에게 실망한 것은 ‘롯데의 강~민호’에게까지 보내기 번트를 시키는 ‘찌질함’ 때문이다.

▲ 저자 이와사키 나쓰미
두번째는 스트라이크가 아닌 볼을 치게 만드는 투구 기술이다. 스트라이크존 바깥으로 빠지는 볼을 던져 헛스윙이나 범타를 유도하는 것인데 기교를 중시하는 일본 야구의 특징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유인구 중심의 이런 일본 야구는 투수의 성장을 가로막고 시합을 길게 끌어 야구를 재미없게 만든다. 반면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공의 날카로움이나 위력을 중시하고 타자와의 정면승부를 즐긴다. 소설은 이렇게 미나미가 피터 드러커의 이론을 야구에 대입해 조직의 목표를 설정하고 내부와 외부 고객의 현실, 욕구, 가치를 파악하고 야구부원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혁신하는 과정을 그린다.

기업에서 배우기

예전엔 경영학이나 행정학이 무슨 학문이냐고 폄하했다. 하지만 요즘은 노동조합, 정당, 시민운동 조직도 필요하면 경영학이나 행정학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필요하면’이라는 전제조차 이미 불필요해졌는지 모른다.

누구나 ‘혁신’을 얘기하는데 그게 말로만 그치지 않으려면 잭 웰치,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의 혁신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뭔지를 찾아야 한다. 그래서 만약 ‘어려운 일을 당할수록 투지가 솟는’ 미나미와 같은 노조 간부가 이 책을 읽는다면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될 것 같다. 노조란 무엇인가. 노조의 고객은 누구인가. 조합원의 현실, 욕구, 가치는 무엇인가. 노조의 마케팅과 이노베이션을 어떻게 할 것인가. 노조활동에서 낡고 진부하고 버려야할 것은 무엇인가. 노조는 ‘고객’에게 어떻게 감동을 줄 것인가.

윤재설 / 진보신당 정책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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