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일본 동북지역에서 발생한 지진의 여파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가 사실상 파괴되는 장면이 실시간으로 생중계됐다. 이른바 천재지변으로 인한 원자력발전소의 파손이라는 사건은 과학이 가장 발달했다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의 처지를 자각하게 하는 계기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방사능물질이 만들어내는 오염이 이후 사람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될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운 현실과 마주했다. 초현대를 운운하는 오늘날 우리들이 얼마나 미약하고 힘없는 존재인지를 새삼 느꼈다. 동시에 ‘위험사회’의 한 가운데에 놓여 있지만 스스로는 위험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 우매함마저 들게 했다.

하지만 이런 비관적인 감정들도 이성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너무나 쉽게 예측할 수 있었던 결과일 뿐이다. 왜냐면, 자연을 거스르는 과학에 대한 맹목에 가까운 믿음은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서는 언제나 무기력해 질 수밖에 없다는 소박한 진리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일본원전사태와 노조운동의 대응

천재지변과 같은 예측하지 못했던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삶을 포기하기 보다는 다시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야 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원전사태와 노동조합운동은 분명한 상관관계를 가진다.

돈만 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본의 탐욕이 만들어 낸 원자력발전소에 대해 노조운동의 자기입장은 누가 보더라도 분명하다. 즉, 노조운동이 원전반대의 입장에 서서 적극적 반대투쟁은 조직하지 못하더라도, 원전이 가지고 있는 비예측적인 위험성이나 불가역적인 피해에 대한 원칙적 반대 정도는 명확히 해야 한다.

노조운동은 입에 발린 원전반대 수준의 입장표명이 아니라 원전 자체에 대한 거부와 반대라는 가치지향은 분명히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노조운동이 이러한 가치지향을 진정으로 체화하고 있는지는 의심스러운 지경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방사능물질이 끼치는 폭력은 인간과 자연 모두에게 신체, 토양, 해양, 물, 공기라는 전(全)방위적인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심리적 동요와 불안 및 공포라는 정신적 폭력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 실리로 표방되는 얄팍한 상술에 가까운 가치지향이 아니라 사회전체적인 변화를 도모하는 가치지향을 노조조직이 가지고 있어야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회인 대안사회를 꿈꿀 수 있다. 그리고 이 꿈이 막연한 희망사항이 아니라 현실로서 이루어지려면 응당 행동도 뒤 따라야 한다. 5월1일 열린 121주년 세계노동절 기념 노동자대회를 마친 노동자들이 “이명박 정권 심판”을 외치며 거리 행진을 하고 있다. 신동준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파괴로 인한 오염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일본에서 노조운동이 실질적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반대운동을 조직하지조차 못하고 있다. 게다가 일본의 바로 옆에 위치하면서 방사능 오염으로 인한 2차 피해를 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우리 역시 몇몇 시민단체가 주도하는 항의성명이나 퍼포먼스성의 집회 정도밖에 없다.

우리에게 행사되는 폭력의 정도에 비해 저항의 정도는 반비례관계에 놓인 현실을 일본과 한국 노조운동의 미약함이라는 원인으로 돌릴 수도 있다. 또한 이미 사용기간이 지난 원자력발전소를 연장해서 사용하는 것을 묵인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신자유주의시대에 노조운동이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보여 줄 뿐이다.

노조운동이 그런 문제까지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느냐는 식의 익숙함은 우리의 4대강 사업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후쿠시마 원전복구 작업에 비정규 노동자를 대거 투입하는 도쿄전력의 만행에 대해 노조운동이 나서야 하는 것 아니냐는 분노가 공감대를 만들 수도 있다. 즉,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신자유주의의 공세 앞에서 수세로 내몰리기만 하였던 노조운동이 공세적 위치에서 자본과 정부를 압박할 수 있었던 기회를 주었다는 점이다.

노조운동의 적극적 공세와 정치지형의 변화

노조운동의 대응정도에 따라 기존의 정치지형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독일 노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독일노총(DGB)은 지난 3월 26일 독일의 4대 대도시인 베를린, 함부르그, 뮌헨, 쾰른에서 약 25만 명이 참석한 대중 집회를 열면서 원전폐지를 주장했다.

일본 원전사태이후 매우 빨리 행동을 기획하고 대중동원까지 해내면서, 이후 각종의 지방선거에서 녹색당이 평균 20%이상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독일노총의 이러한 발 빠른 행보는 1986년에 일어난 체르노빌 원전사고라는 경험이 이미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노조운동이 반핵과 생태라는 가치지향은 분명히 해야 한다는 의지의 표명 때문일 수 있다.

즉, 자본과 정부가 원전의 경제적 효율성에 집착하면서 사회적 주도권을 발휘하고 있다고는 하더라도 독일노총은 에너지 정책의 기본방향을 수정해야 한다는 자신의 목소리를 결코 당위적이 아니라 사회와 개인의 생존과 안전에 누구의 말이 정당한지를 확인시킬 기회로 삼았다고 보인다.

독일 노조에서도 조직노동과 대기업 노동자 중심의 실리주의는 엄연히 존재하지만, 사회전체의 생존권이 걸린 문제에서 노조운동이 최대한 발언하고 영향력을 확대해야 한다는 입장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바로 이러한 노력 속에서 노조운동의 사회적 영향력 확대는 가능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우리의 현실

서울지하철노조의 민주노총탈퇴 조합원 투표결과로 통해 ‘제 3노총’으로 대표되는 복수노조 문제가 시중에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이 논란의 중심엔 노동자 내부의 갈등과 분열만 부각되면서 정작 중요한 노조조직이 지향하는 가치지향의 문제는 등한시되곤 한다.

친자본 혹은 친기업적인 노조조직이 실용과 실리를 자신들의 가치지향이라고 표명하지만, 도대체 누구를 위한 실리인지는 사실 불을 보듯 뻔하다. 왜냐면, 전체 노동자 계급의 이익에 반하는 그들만의 실리가 과연 얼마만큼 지탱될지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수의 실리를 위해 다수가 희생해야 하는 신자유주의 체제를 더욱 공공하게 만들면서 종국에는 노조가 노동귀족들의 조직으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에 대해서는 그냥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뻔뻔함에 분노하기보다는 민주노총은 과연 그들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 지를 가치지향을 통해 분명히 해야 한다.

실리로 표방되는 얄팍한 상술에 가까운 가치지향이 아니라 사회전체적인 변화를 도모하는 가치지향을 노조조직이 가지고 있어야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회인 대안사회를 꿈꿀 수 있다. 그리고 이 꿈이 막연한 희망사항이 아니라 현실로서 이루어지려면 응당 행동도 뒤 따라야 하고, 이를 위한 노력이 존재할 때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추상적 용어는 구체적 내용물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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