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돌아가면서 수업일기를 쓰게 한다. 그 수업시간에 일어난 일들이나 수업시간에 생각해보았던 것을 일기 형태로 쓰게 하는 것이다. 나는 다음 수업을 시작할 때 수업일기를 읽고 시작한다. 한 학기에 한번이라도 그 아이가 내 수업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기회이기에 나는 11년째 수업일기를 쓴다.

지난 해 수업시간 내내 거의 엎어져 자는 학생이 있었다. 나는 그 학생이 수업일기를 쓸 차례가 되었을 때 내심 불편한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그 학생은 그 전에도 계속 잤고, 자신이 일기를 쓸 차례일 때도 잤으니 일기를 제대로 쓸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학생이 이런 일기를 썼다.

“선생님은 오늘도 똑같이 ‘인사하겠습니다’라는 말과 인사로 우렁차게 수업을 시작하였다. 오늘 ‘논술 쓰는 방법’에 대해 수업을 했다. 아니 그런 것 같다. 내가 그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라고 쓰면 거짓말이다.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수업시간에 잤다. 하지만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잘 웃으신다. 웃으면서 수업을 하시기 때문에 나는 좋은 기를 받으며 잘 수 있었다.

나는 학교에 오는 시간이 무척 아깝다. 내가 배우고 싶지도 않은 것을 억지로 들으면서 앉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나는 대학을 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인(in)서울’대학에 가지 않으면 사실 대학 갈 필요도 없다. 엄마는 아무데라도 들어가라고 하지만, 멀리 가봤자 돈만 들고 졸업장 딴 보람도 없다. 우리 반에서 ‘인(in)서울’ 대학 갈 수 있는 애는 한 둘이다. 나는 죽었다 깨도 거기에 못 갈 것이다. 근데 내가 왜 학교에 다녀야할까? 아침부터 교문에서 선도부 때문에 스트레스 받으면서 들어와 왜 듣고 싶지도 않은 수업을 주구장창 들으면서 시간을 죽여야 할까? 고등학교 졸업장은 따야 된다고 하는데, 정말 학교에서 버리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 ”

수업 내내 엎어져 자던 학생

이 수업일기를 보고 무척 놀랐다. 이 아이가 생각을 하는 살아있는 존재였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은 것이다. 나에게 이 이 아이는 거의 그 반의 ‘가구’ 같은 존재였다. 처음엔 그 아이를 깨워봤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다시 쓰러졌다. 화장실을 다녀오라 해도 다녀와서 다시 쓰러졌다. 아이들도 원래 모든 시간에 자는 아이니 신경을 끄시라고 말했다. 수업이 끝나는 종이 쳐도 일어날 줄 모르는, 아이들 말에 따르면 점심시간에 일어나 식당에 가고 갔다 오면 다시 잠이 든다고 했다.

▲ 야간학습을 강제로 하는 학교는 ‘땡땡이’ 치는 학생들과 전쟁을 벌인다. 학교는 아이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야근’을 강제하기 위해 호통치고 아이들은 자신의 시간을 되찾기 위해 골몰한다.

나는 사실 그 아이에게 똑같은 말을 하고 싶었다.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학교에 와서 잠만 자면 어떻게 하냐고. 너희 부모님은 네가 이렇게 학교에 와서 자는 걸 알고 계시냐’고. 그런데 그 아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매일 자기의 소중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아이가 잠을 자는 것은 그냥 졸려서가 아니라 어떤 집요한 ‘선택’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자기가 배우고 싶은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입시에 나오는 것만 가르치는, 그래서 입시에 관심이 없는 자기와 같은 사람에게는 필요 없는 수업에 대한 일종의 준법 투쟁.

수업 시간에 자는 행위는 올바른 것은 아니지만,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에 유일하게 용인되는 행위다. 그래서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싶을 때 잠을 잔다. 수업을 시작할 때는 그래도 잠에서 깬다. 그러다 선생님이 어떤 수업을 준비해왔는지 간을 보고, 수행평가에 들어가거나, 재밌어 보이거나 쉬워서 할 만 해 보이면 조금 관심을 갖는다. 수업 내용이 너무 어렵거나 할 필요를 못 느끼면 쓰러지기 시작한다. 상습적으로 자는 학생들도 적어도 어떤 흐름으로 수업이 진행되는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자는 척 한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어떤 그 상태로 가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이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활동을 할 시간에 자신의 에너지를 쓴다. 어른들이 늘 뭐라고 하는 친구들과 돌아다니는 시간, 사실 그 시간에 에너지를 쓰기 위해 다른 시간의 에너지를 비축한다.

잠, 무의미한 수업에 대항하는 ‘준법투쟁’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소외되지 않고 의미 있게 시간을 보내기를 바란다. 노동 시간 단축을 외치는 것도 의미 없는 노동시간을 줄이고 창의적인 노동, 즐거움과 함께 하는 소외되지 않는 시간을 얻기 위해서다. 노동 운동 역사가 사실 자본과 노동의 ‘시간’을 둘러싼 투쟁의 역사이고 하루 8시간 노동을 쟁취한 것이 메이데이의 기원이 아닌가?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학교에서 개성을 표현하고, 친구들과 추억을 쌓고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기를 원한다. 학교가 그런 것을 제공하지 못하거나 자기를 소외시키는 입시 위주 학습 노동을 강요할 때는 그것을 거부한다. 억지로 무의미한 것을 듣느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재미라도 찾고, 잠이라도 청해 휴식을 청한다. 이 전쟁은 방과 후에도 끊이지 않는다. 야간학습을 하는 강제로 하는 학교는 ‘땡땡이’ 치는 학생들과 전쟁을 벌인다. 학교는 아이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야근’을 강제하기 위해 호통치고 아이들은 자신의 시간을 되찾기 위해 골몰한다.

학생들 중 포토샵 등을 다루는 아이들은 처방전이나 학부모 확인증을 만들어주는 ‘흥신소’를 차리기도 한다. 야간학습을 강제로 하지 않는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자신들을 불러들이는 학원과 전쟁을 한다. 그들은 불러들이는 곳과 전쟁하기 위해 아프기도 하고, 부모님께 큰 일이 생기기도 하고, 할머니가 아프시기도 하다. 아이들은 오늘도 ‘시간’을 둘러싼 치열한 투쟁을 하고 있다. 학교는 아이들의 이 투쟁에 어떤 대답을 하고 있을까. 아니 이 사회는 아이들의 신호에 어떤 대답을 준비하고 있는가.

조영선 / 서울 경인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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