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현장을 찾는 역사기행이 책보다 더 생생하게 역사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은 현장에 가보면 안다. 그런 곳으로 내가 가장 먼저 꼽는 곳이 전라북도 부안군에 있는 백산이다. 높이는 47m 정도 밖에 안 된다. 언덕 같이 낮은 산을 오르다 뒤를 돌아보면 배들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쪽으로는 김제 만경평야가 끝을 찾을 수 없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다.

처음 백산에 올랐을 때 나도 모르게 “저 곳이 조선시대 지주제가 펼쳐졌던 현장이구나!”하는 소리를 터뜨렸다. 산이 많은 밭농사 지역에서는 지주제의 실상을 잘 그릴 수 없었다.

▲ 백산에서 내려다본 김제평야.

자연 지리 공간의 특성만 아니라 현실의 경험은 과거 역사를 되돌아보고 풍부하게 만드는 힘이다. 나는 1987년 6월 항쟁과 7, 8, 9월 노동자 대투쟁을 겪고 1894년 농민전쟁(동학농민혁명)을 다시 보게 됐다. 특히 1988년 11월 13일 ‘전태일열사 정신계승 노동법개정 전국노동자대회’ 뒤에 백산에서 느꼈던 역사는 예전과 달랐다.

노동자대회 뒤에 다시 느낀 ‘백산’

매년 가을 열리는 노동자대회가 시작된 1988년 노동자대회에는 그때까지 우리 역사에서 전국의 노동자들이 한 자리에 가장 많이 모인 집회였다. 1946년 해방 공간의 메이데이 때나 1987년 7, 8, 9월 투쟁 때 울산 남목고개를 넘었던 노동자들 수는 더 많았으나, ‘전국’에서 모인 것은 아니었다.

‘노동해방’ 깃발이 노동자대중 전면에 선 것도 1988년 11월13일이었다. 노동자들은 노동해방 깃발을 앞세우고 여의도까지 행진했다. 집회를 마치고 해산할 때 사회자가 전국 곳곳에서 온 노동자들을 불렀다. “울산 동지들!”, “마창 동지들”!, “제주도 동지들!” 남쪽의 노동자들이 기차를 몇 칸을 통째로 전세 냈고, 마창노동자들은 관광버스 18대를 대절했으며, 제주도에서는 비행기를 타고 왔다.

▲ 1988년 11월13일 열린 전국노동자대회.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그 함성을 들으면서 교통 통신의 발달에 따라 노동자들이 더 쉽고 빠르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책이 아니라 현실에서 보았다. 한자리에 모인 전국의 노동자들을 보면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구호가 가슴을 울리며 떠올랐다.

나는 1988년 노동자대회를 겪고 나서 다시 백산에 올랐다. 1894년 백산에 모인 농민군들을 떠올렸다. 1893년에도 보은이나 원평에 많은 농민들이 모였다. 1984년 음력 3월, 바로 요즘 같이 봄이 깊어가던 계절, 서울까지 진격하겠다고 선포한 뒤 죽창이라는 무기를 들고 ‘앉으면 죽산이요 서면 백산’이 되어 백산을 뒤덮었을 때 느낀 감정은 이전과 또 달랐을 것이다.

백산에 서서 농민들은 누군가 외치기 전에 죽창을 들고 김제 만경평야를 내려다보았을 것이고, 누군가 “봄부터 가을까지 겨울에도 쉬지 못하고 일 년 내내 허리가 휘어지도록 뼈가 빠지도록 일하는 저 땅은 뉘 땅인가 저 곳에서 난 벼는 누가 빼앗아 어디로 가지고 가는가”하며 열변을 토했을 것이고, 농민들은 소리 높여 맞장구를 쳤을 것이다.

1894년 농민전쟁의 배경

1876년부터 개항 통상이 이루어지면서 조선 사회는 ‘외세’와 급박하게 마주치게 됐다. 어떻게 대응해야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새롭게 제기됐다. ‘민족의 위기’라는 추상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사회경제의 변화와 함께 민중의 삶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주층은 일본에 쌀을 팔아서 더 많은 돈을 벌었다. 쌀을 일본에 팔면 국내시장보다 더 비싸게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상인들과 제 이익 챙기기에 급급했던 조선 상인들은 조선 쌀을 비싸게 사도 일본보다는 싸므로 ‘입도선매’까지 벌이는 형편이었다. 이에 따라 지주들은 땅을 늘려 지주경영을 강화하고 지대를 높이면서 소작농을 쥐어짰다. 반면 소빈농층은 빠르게 몰락하고, 하층농민의 처지는 더욱 어려워졌다.

한편 외국상품이 들어오면서 국내 토착산업이 흔들렸다. 기계로 만들어낸 질 좋고 값싼 ‘옥양목’이 수입되자 가장 먼저 발전하던 국내 토포(광목)사업이 흔들렸다. 부농을 포함한 면화재배 농민들과 관련 소상인들이 타격을 받았다.

개항 뒤 지배층의 소비욕구와 재산은 늘었으며, 그에 따른 수탈은 더욱 심해졌다. 일부는 쌀무역에 편승해 부를 축적하기도 하였으나, 서민지주나 부농들도 면작농업에서 타격을 받았으며, 지배층의 수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변화 과정에서 이익을 보는 층이 생기는 반면 더 큰 손해를 보는 층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백산에 서서 보면 그 과정이 다른 어느 곳 보다 그림처럼 그려진다.

고부에서 봉기하다

1894년 농민전쟁에 관한 자료만 뒤적이고, 자료를 바탕으로 쓴 논문이나 책만 읽으면서 백산이 1984년 농민전쟁 때 전략전술적인 요충지였다고 하는 설명만으로는 백산에서 농민군들이 느꼈을 감격과 결의를 추체험할 수 없다. 그래서 답사의 핵심은 현장성이다.

노동운동. 민중운동 단체에서 교육과 수련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역사기행에서 내가 첫 번째로 안내하거나 소개하는 답사지는 1894년 농민전쟁(동학농민혁명)의 역사 현장이다. 이유는 당시 농민군들이 추구했던 평등세상의 꿈은 아직도 이루어야할 현재의 꿈이기 때문이다.

▲ 백산 꼭대기에 있는 동학혁명백산창의비.
1894년 농민전쟁은 1월 고부농민봉기에서 시작해서 3월부터 시작한 제1차 농민전쟁, 전주성을 점령한 뒤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농민들이 지방을 장악하고 자치 질서를 유지했던 집강소시기, 9월부터 다시 전개된 2차 농민전쟁을 거치면서 1년 내내 계속된 근현대 전국 규모의 가장 큰 민중투쟁이며 변혁운동이었다.

이제 백산에 올라 1894년 역사기행을 시작해보자. 백산은 1894년 농민전쟁의 배경과 전개과정, 의의를 개관하기 적합할 뿐 아니라, 고부농민봉기 이후 1차 농민전쟁 과정에서 농민군이 두 번 결집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1894년 농민전쟁은 1894년 고부봉기에서 시작됐다. 고부 지방은 평야지대로 관리와 지주의 탐학이 어느 곳 보다 심했다. 개항 이후 일본과 무역이 확대되면서 수탈의 강도가 더욱 높아졌고, 일본상인들의 침탈도 심했다. 1892년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탐관오리의 전형으로 갖은 탐학을 자행했다.

1894년 1월 말목장터에 모인 농민들은 죽창으로 무장하고 고부관아로 몰려갔다. 관아를 점령한 농민들은 조세장부를 불사르고, 감옥 문을 열어 죄 없이 잡혀갔던 백성들을 풀어줬다. 창고를 열어 억울하게 빼앗겼던 곡식을 돌려줬다. 농민들은 정읍천으로 달려가 탐학의 상징이었던 만석보를 부쉈다. 농민군은 백산으로 옮겨 진을 치고 다른 지역에서도 농민들이 봉기할 것을 촉구했다.

정부는 조병갑을 파직하고 박원명을 군수로 임명해 농민들을 무마하는 한편, 이용태를 안핵사로 보내 사태를 수습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용태는 오히려 무고한 농민들을 동학도로 몰아 학살을 자행하고 재산을 약탈했다.

백산에서 서울로 진격 선언

전봉준은 핵심 농민군을 이끌고 손화중이 접주로 있는 무장으로 가서 새로운 싸움을 준비했다. 고부 싸움에서 이겼다는 소식을 들은 전라도 각지의 농민들이 전봉준이 보낸 격문에 따라 무장으로 모여들었다. 농민들은 무기와 군량을 마련하고 싸울 훈련을 했다. 준비를 마친 농민군은 3월20일 창의문을 발표하고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아래 싸움에 나섰다.

무장을 출발해 다시 고부를 점령하고 백산에 진을 친 농민군은 호남창의소를 설치하고 조직체계를 정비했다. 전봉준을 창의대장, 손화중과 김개남을 총관령으로 추대하고 행동강령과 격문을 발표했다. 농민군은 서울까지 진격해 외세를 물리치고 탐관오리들을 몰아내겠다고 선포했다.

다음에는 두 번에 걸쳐 백산 이외 1894년 농민전쟁 현장을 보여줄 예정이다.

박준성/ 노동자 역사 <한내> 연구위원

1894년 농민전쟁 역사기행을 할 때, 하루 일정이라면, 백산에서 시작해 전봉준고택, 말목장터(점심), 만석보, 동학농민혁명기념관, 황토현 동학혁명기념비, 고부관아터(고부초등학교), 신중리 주산마을 동학혁명 모의탑, 무명농민군 위령탑을 들러 볼 수 있다.

1박 2일이면, 고창 선운사 쪽에서 하루 밤 자고, 새벽에 도솔암, 천마대와 낙조대에 올랐다가 선운사를 둘러본다. 아침을 먹은 뒤 고창읍 전봉준 생가 터, 고창읍성, 원평 농민전쟁 유적지, 전주 농민군 입성비, 삼례 역사광장, 공주 우금치를 둘러보는 일정을 잡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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