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TV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MBC <백분토론>을 봤다. 마침 500회 특집으로 한국사회에 만연한 ‘불신’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저분이 나와 생각이 다르면 뭐가 다른가 생각하지 않고 ‘너는 틀렸어’라고 해버린다. ‘나하고 생각이 다르네. 왜 다르죠. 얘기 좀 들어봅시다. 나와 얘기해볼까요’가 아니라 ‘넌 틀렸어!’ 이렇게 나가니까 저항감을 가질 수밖에 없고, 편이 갈라질 수밖에 없다.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무릎걸음으로 낮춰서 시선을 맞추고 교감하는 자세가 필요한데 오히려 교감과 겸손의 자세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불신을 계속 낳고 ‘너는 우리를 이끌 자격 없다’ 이런 생각을 하게끔 만든다.”

순간 뜨끔했다. 패널로 나온 ‘시골의사’ 박경철 씨가 마치 지금의 진보진영을 질책하는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와 생각이 다르면 그건 무조건 틀린 것이고 더 들을 것도 없다, 생각이 같은 우리끼리만 만나면 된다, 소통하지 않는 정부를 비판하지만 정작 심각한 것은 우리 내부의 소통이다…. 그닥 새로울 것 없는, 이런 지적들이 그동안 숱하게 나왔지만 한국사회에서 진보진영이야말로 가장 변함이 없는(!) 세력 같다.

▲ 책표지
자신의 생각과 믿음을 의심하는 것,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내 생각을 교정하고 합의점을 찾아나가려는 노력은 좀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경청하고 대화하는 법을 익히는 것 같다. ‘사상’과 ‘이념’ 교육보다 더 시급한 건 ‘인성’ 교육이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드는 요즘이다.

‘지금 여기’의 나를 의식하기

그래서 집어든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노동운동가 출신의 저자 이현경 씨가 의사소통 향상과 자기성찰 프로그램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말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뜻을 품은 사람들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이 빚어지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책은 먼저 의사소통-인간관계-삶의 각 측면에서 ‘깨어있을 것’을 권한다. ‘깨어있기’란 틱낫한 스님에 따르면 “걷고 있을 때 자신이 걷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앉아 있을 때 자신이 앉아 있다는 것을 깨닫고, 누워 있을 때 자신이 누워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의 경우라면 자신이 지금 ‘금속노조 기관지 <금속노동자>에서 『온전함에 이르는 대화』라는 책을 소개하는 칼럼을 읽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명료하게 의식하는 것이다.

흘려 읽고, 흘려 듣고, 흘려 보고, 느끼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에 생각을 집중하면 표면적인 생각 아래로 내려가 무의식과 더 깊은 심층의 의식까지 알아차리게 된다. 그러면 의사소통과 관계 전반에서 훨씬 깊은 경험을 할 수 있고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는 힘도 생긴다는 것이다.

나의 감정을 전달하기

책에서 제시된 ‘나 전달법’(I-message)은 실생활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부부사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신’으로 시작하는 말보다 ‘나’로 시작하는 말을 사용하라는 얘기는 유명하다. “당신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보다는 “그런 말을 들으니 난 좀 섭섭하네”라는 식으로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를 드러낼 뿐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비난하지 않으므로 그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보니 며칠 전 집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여덟 살 먹은 딸아이가 아침밥을 먹는데 꾸물거리길래 “밥 좀 빨리 먹어라” 했더니 버럭 화를 낸다. 왜 소리를 지르냐고 물으니 아빠가 명령을 해서 그렇단다. 자기한테 명령을 하지말고 ‘밥 좀 빨리 먹었으면 좋겠네’라고 하란다. “치카치카 해라”, “옷 안 갈아입니”가 아니라 “치카치카 했으면 좋겠네”, “지금 옷 갈아입으면 나중에 허둥지둥 안 할 것 같은데”라고 했더니 아침이 좀 편해졌다.

부모가 아이의 행동을 비난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감정, 희망을 얘기하는 것으로 아이는 자기가 존중받고 있다고 느끼게 되고 스스로 부모를 배려하려는 마음을 갖게 된다.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는 대화의 기술을 그날 아이에게 배웠다.

우리는 말을 통해 상처를 주고 받는다. 그러나 그 상처를 치유하는 것도 말을 통해서다. 책에는 한 워크샵 참가자들이 뽑은 ‘상처받은 말’과 ‘감동받은 말’을 모아놨는데 ‘상처받은 말’은 다음과 같다.

넌 만날 왜 그 모양이야?
여자가 너무 설치는 거 아니야?
무슨 자격으로 당신이 나와?
집안일은 쉬는 날 하지, 왜 휴가를 써?
뒷돈 받아 챙겼으면서….
저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다른 사람 다 되도 너는 안 돼.
그것밖에 못해요?

‘감동받은 말’을 우리 식으로 바꾸면 이렇다.

동지는 할 수 있습니다.
네가 최고야.
동지! 힘내요.
항상 널 믿는다.
동지 덕분에 우리가 해냈어.
우리는 잘할 수 있어.
선배가 있으니 큰 힘이 됩니다.
동지 잘못이 아니라 우리가 잘못한 겁니다.

깨어있는 조직 만들기 바로 지금부터

책에는 각급 소모임에서 수련회 같은 자리를 통해 깨어있는 듣기, 깨어있는 말하기, 칭찬하기 등 활용할 수 있는 교육프로그램이 제시돼 있다. 처음 하려면 ‘수족 근육이 수축’되는 잠깐의 부작용(?)이 생길지도 모르겠지만 이것만 잘 극복하면 놀라운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절이나 천주교 수도공동체 같이 깨달음과 진리를 추구하는 조직에서도 서로에 대한 불신과 비난, 편 가르기가 다른 곳 못지않게 많이 나타난다고 한다. ‘깨어있는 조직 만들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일지 감이 온다. 하지만 재능과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 하나둘 운동을 접고 떠나는 현실을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될 거 같다.

윤재설 / 진보신당 정책연구위원

저작권자 © 금속노동자 ilabo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