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과 백만 있는 세상이 있다. 흑이 아니면 백이므로 논리가 앙상하고 억지가 난무한다. 말을 뱉을 때마다 쇳소리가 나고 말과 말이 쨍쨍 부딪친다. 싸움만 존재하고, 문제 해결은 관심에서 점점 멀어진다. 사람 목숨이 달린 일조차 흑백으로만 보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 노동자는 그래서는 안된다. 흑백논리에 놀아나서도 안된다.

지난 2월 13일 서울 영등포 문래동에서 피자배달을 마치고 가게로 돌아가던 19세 청년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청년은 사거리에서 좌회전 신호를 기다렸다 신호가 바뀐 후 출발했다. 청년은 건너편에서 신호를 어기고 빠르게 직진하던 버스에 치여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다음날 MBC 뉴스데스크는 피자회사간의 속도경쟁을 불러일으킨 ‘30분 배달제’에 한 원인이 있다고 지적했다. KBS 9시 뉴스는 신호위반 버스에 의한 사고라는 것에 초점을 좀 더 두었다. 이것을 두고 MBC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신호위반을 한 버스기사가 일으킨 사고인데, 어째서 피자회사들에게 30분 배달제를 폐지 요구를 중심으로 보도하느냐는 것이었다.

30분 배달제 운동을 하는 불순세력들이 어린 청년의 사망사고를 이용하고 있고 MBC가 놀아나고 있다는 식의 여론몰이까지 등장했다. 이러한 주장이 그럴듯하게 들리는지 트위터에서 리트윗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부 신문은 이러한 주장들을 재밌다며 보도하기도 했다. 이들의 핵심요지는 버스운전사의 위험운전이 직접 원인이었으니 이를 비난하라는 것이다. 피해자인 피자회사를 못살게 굴지 말라는 것은 덤이다.

▲ 노동자들은 피자배달 청소년과 청년들의 안전을 확보하고 죽음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하고 사고를 분석해 볼 것이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모든 차량의 안전운전이 필요하다는 것과 함께, 피자배달 노동자들이 안전운전을 하기 위한 노동조건을 갖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지난해 12월23일 청년유니온 조합원들이 경기 과천 고용노동부 청사 앞에서 배달 노동자들의 안전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사고조사의 최신이론은 이러한 주장을 매우 위험하다고 본다. 사고조사 이론에서는 첫째, 사고의 원인을 파악하는 이유는 책임자 문책 보다 동종사고예방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둘째, 사고는 다양한 오류가 작동해 시스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지, 특정한 하나의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보자면 특정한 한 가지 원인만을 찾아내서 대책을 세운다면 동일한 사고는 계속 반복된다고 한다. 사고예방을 위해서는 다양한 오류를 찾아내서 입체적인 대책을 세워야한다는 것이다.

이번 사고에 사고분석기법을 적용해보자. 교통위반을 한 버스는 의심의 여지 없는 사고의 원인이다. 동시에 또 한 가지 요인이 사고에 작용한 것도 확실하다. 사거리에서 신호가 바뀌면 가장 먼저 할 일은 엑셀을 밟는 것이 아니라, 신호위반 차량은 없는지 출발해도 좋은지 확인하는 것이다.

불과 1, 2초 밖에 걸리지 않는 일이다. 이번 사고에서도 신호위반 버스가 중요한 원인이기는 하지만, 버스가 달려오는데 그것을 확인하지 못하고 좌회전하는 문제가 중복됐기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 따라서 사고원인은 최소 두 가지로 봐야 한다. 신호위반 버스와 함께, 빨리 배달하려고 안전확보를 하지 못한 것이 중요한 사고원인인 것이다.

노동자들은 피자배달 청소년과 청년들의 안전을 확보하고 죽음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하고 사고를 분석해 볼 것이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모든 차량의 안전운전이 필요하다는 것과 함께, 피자배달 노동자들이 안전운전을 하기 위한 노동조건을 갖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빨리 배달하기 위하여 1, 2초의 안전확보 시간마저 잃어버리게 된 것이라면, 30분 내에 빨리 피자를 배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중요한 원인으로 지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횡단보도에서 신호가 바뀌자마자 건너가려던 피자배달 오토바이를 신호위반 택시가 치어서 노동자가 사망한 것과 이번 사고는 너무도 똑같다.

버스와 택시에게 안전운전을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피자배달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목숨을 위한 여유시간을 달라는 것이 정녕 문제가 된단 말인가?  더 들어가면 버스노동자가 왜 정지하지 않고 엑셀을 더 힘차게 밟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버스노동자가 배차시간의 문제 등으로 인해 압박을 받고 있었던 상황으로 밝혀진다면 얘기는 또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인 얘기를 하자면, 저임금에 위험한 노동을 강요하면서 청소년들에게 배달일을 시키는 것이 정상인가 하는 질문도 던져야 한다.

흑과 백이 아니라 회색도 있다. 덜 진한 회색도 있고, 아주 진한 회색도 있다. 하나의 사고를 바라보면서 다양한 원인을 고민하고, 오류를 찾아내서 수정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입장이 진정한 노동자의 입장이다. 그렇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한 한 가지를 붙잡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자본의 입장이거나, 남을 배려할 마음이 없는 헛똑똑이들의 잘난 척에 불과하다.

김신범 / 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산업위생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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