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시간을 내 일본 고베에 다녀왔다. 가는 비행기 안 <NHK>의 아침뉴스 자막에 나온 한자를 미루어 짐작해보니 사회복지재원 마련 방안과 관련해 사회보험방식과 세금방식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는 것 같았다.

국내 보수일간지와 경제지들은 일본의 국가신용등급 하락과 재정악화와 관련해 “퍼주기식 복지정책이 재정위기를 몰고왔다”는 식으로 보도를 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과거 자민당 정권에서 경기부양을 위해 건설족에게 돈을 퍼주고 부자들한테는 세금을 깎아줘서 세수가 크게 줄어든 것이 재정위기의 진짜 원인이다.

▲ 책표지
두 시간 남짓 날아간 비행기는 오사카의 간사이 국제공항에 내렸다. 고베로 가는 고속도로 옆으로 한신공업지대가 눈에 들어왔다. 고도성장기 일본을 이른바 ‘1억 총중류사회’로 이끈 바로 그곳이다.

일본여행길에는 일본소설이 어울릴 것 같아 오쿠다 히데오의 『꿈의 도시』를 집어들었다. 국내에서도 꽤 인기있는 오쿠다 히데오는 그동안 『남쪽으로 튀어!』, 『공중그네』, 『올림픽의 몸값』 등 유머와 해학이 넘치는 유쾌한 소설을 써왔다. 이 탁월한 이야기꾼은 유메노라는 지방도시에서 사는 인물 다섯 명의 이야기를 빠르게 전개시키면서 독자들을 자연스럽게 몰입시킨다. 책의 줄거리는 이렇다.

‘꿈의’(夢の)와 같은 발음의 유메노라는 도시가 있다. 유다, 메카타, 노카타라는 세 개 읍이 합병해 탄생한 도시다. 예전의 공동체와 재래시장은 사라지고 대형 아울렛과 패밀리 레스토랑, 파친코가 국도변을 장악했다.

그 도시에 배속된 사회복지공무원 도모노리의 꿈은 이 암울한 회색도시를 탈출해 현청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무코다 고등학교 2학년인 여고생 후미에도 이 도시를 탈출해 도쿄에 있는 대학으로 입학하는 게 꿈이다. 노인들만 사는 집을 골라 누전차단기를 교체해준다며 엄청난 돈을 뜯어내는 전직 폭주족 유야의 꿈은 열심히 사기를 쳐서 실적을 올리는 것이다. 마트 보안요원으로 일하다 해고된 다에코의 꿈은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것이고 지역토호 건설족 출신 시의원 야마모토의 꿈은 재선에 성공하는 것이다.

소설은 이렇게 관련 없을 것 같은 다섯 인물들의 이야기를 각각 펼쳐나가면서 서로 얽히고설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작가는 지금 일본사회, 특히 낙후된 지방도시가 안고 있는 병폐를 고발한다.

▲ 작가 오쿠다 히데오
온갖 방법을 동원해 생활보호 대상자를 줄여야 하는 도모노리는 불륜현장을 좇는 일에 빠지고, 다에코는 신흥종교에 빠진다. 후미에를 납치한 노부히코는 컴퓨터게임에 빠져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구분하지 못한다. 주부 원조교제, 사이비 종교, 불경기, 실업과 파견제, 따돌림과 은둔형외톨이, 권력과 재력과 폭력의 유착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유메노가 안고 있는 이런 병폐들로 인해 이들의 꿈은 뒤틀리고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다에코는 결말부 파국에서 낯선 사람들의 격려를 받고 감동한다. “낯선 사람들이 격려해주었다. 필사적인 성원이 귀에 와 닿았다. 내내 잊고 있던 인간의 다정함이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런 고마움을 좀 더 일찍 느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마도 오쿠다 히데오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여기에 담긴 것 같다.

책을 덮고 고베 시내를 구경하다 파친코에 들어가 본 적이 있었다. 변두리인데도 파친코 여러 곳이 성업 중이었다. 그곳에서는 각자 구슬을 한 바구니 가득 담아놓고 슬롯머신에 열중하는 중년과 노년의 남자들이 담배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텔레비전을 켜니 극우성향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가 TV에 출연해 일본이 위기에 빠졌다며 일본국민들에게 애국심을 강요하고 있었다. 이게 일본이다. 돌아와보니 해적소탕작전을 두고 이명박식 ‘스펙타클 포퓰리즘’도 난리가 아니다. 여기나 거기나 별반 다르지 않다. 올 한해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윤재설 / 민주노총 전 선전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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