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다. 1945년 8월 14일 변절한 사람도 있었다. 일제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무엇을 생각했을까. 지금 알고 있는 것을 어제만 알았어도 하루를 더 버텨 당당하고 가슴 벅차게 해방을 맞이했을 텐데 하며 후회했을 것이다. 하루만큼의 희망이 부족했고 역사의식이 짧았던 것이다.

아무리 아쉽고 후회스러워도 과거의 일들을 없앨 수도, 없었던 것을 다시 만들어 끼워 넣을 수도 없다. 개인이든 사회든 시간이 지나고 나서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그때에 지금을 비춰보는 일들을 되풀이 한다. 지금 여기서 하고 있는 일이 ‘있어야 할 곳에 있으면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판단하고 선택할 때 역사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하며 후회와 아쉬움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하여 ‘그때’ 즉 과거 역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때’는 지금을 비춰보는 거울이고 지금을 거쳐 미래의 길을 비춰 주는 등대 노릇을 한다.

희망이 부족했고 역사의식도 짧았다

그런데 살다보면 지나간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연연하지 말고, 잊어버리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우리 근현대사를 보면 대표적으로 친일파들이 ‘과거를 묻지 마세요’하고 합창했다. 현실에서도 지배세력도 마찬가지이다. 자기에게 유리한 과거 사실만을 추려내고 불리하다고 생각하면 사실을 왜곡(비틀기), 과장(보태기), 미화(꾸미기), 은폐(숨기기), 배제(빼기)한다. 현실의 모순 구조를 은폐하고 고정 불변한 완결체로 선전함으로써 자신들의 지위와 특권을 계속 유지 확대하려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 5월 27일 새벽을 가르며 끓어질 듯 이어지며 들려오던 "광주시민 여러분,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를 기억해 주십시오"하는 젊은 여성의 애끓는 외침을 듣고도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설 수 없었던 사람들은 오래 동안 그 소리가 가슴을 후비는 고통으로 살아나곤 했다고 한다. 우리를 기억해 달라는 간절한 외침은 지금도 새겨들어야할 역사의 소리이다.

▲ 진실을 외면하고 과거를 잊었을 때 1980년에 ‘광주’에서 겪었던 고통과 비극을 또 당할 수 있다

1987년 12월 광주학살의 주역 전두환이 백담사에 유배되었다. 1995년 전두환 노태우가 감옥에 갔다. 그들이 저절로, 제 발로 감옥에 간 것이 아니었다. 1980년 20살이었던 사람들이 35살이 될 때까지, 25살이었던 사람들이 40살이 될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젊은 청춘을 바쳐 민주화 운동에 나선 결과였다. 그들 가운데 일부가 변절하고 맛이 갔다고 해서 그 핏빛 역사에 무임승차한 자들이 비아냥거려도 될 만큼 가벼운 민주화가 아니었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

그렇게 얻은 형식 절차상의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진정한 민주주의로 나갔어야 하는데 요즘 상황은 역사의 시계가 거꾸로 돌고 있는 것 같다. 지금은 어린이 역사 체험관으로 바뀌 광주 망월동 신묘역 사진 전시관 벽에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글귀가 붙어 있었다. 진실을 외면하고 과거를 잊었을 때 1980년에 ‘광주’에서 겪었던 고통과 비극을 또 당할 수 있다는 경고이다.

<또 다시 앞으로>라는 노동가요가 있다.
“가버린 세월을 탓하지 마라 지나간 청춘일랑 욕하지 마라... 자 또 다시 일어나 역사에 발맞추어 하나! 둘! 셋! 앞으로 또 다시 앞으로 눈덩이 쇳덩이로 앞으로 굴러 끝내는 우리가 건설할 세상을 향해 앞으로!”

‘과거는 흘러갔다’나 ‘과거를 묻지 마세요’ 같은 청승맞은 사랑타령이 아니라 힘차게 희망을 노래하는 내용이다. 가버린 세월 지나간 청춘을 탓하거나 욕하지 말고 ‘지금 여기’서 ‘그때 거기’의 역사를 돌아보며 미래를 새롭게 만들어 가자는 뜻이 담겨 있다. 역사에 발맞추어 가려면 역사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삶과 실천이 역사의 길을 따라 가고 있는 것인지, 우리가 건설할 세상을 향해 제대로 나아가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여기, 그리고 그때 거기

자본주의 모순과 양극화가 더욱 심회되고 있는 현실을 80:20, 90:10의 사회라고도 한다. 사회구성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80과 90에 속하는 사람들이 왜 소수인 20과 10에 지배를 당할까. 20과 10이 자본과 권력과 지배장치를 틀어쥐고 있기 때문이지만, 80과 90에 속하는 사람들이 20과 10의 지배를 당연시하고 오히려 지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20과 10에 속한 지배세력이 현실을 지배하는 힘 가운데가 그들이 틀어쥔 역사이다.

▲ 필자
<동물농장>, <1984년> 같은 소설을 쓴 조지 오웰은 과거의 기억을 장악하는 자(세력)가 역사를 지배하고, 역사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고 했다. 그에 맞서 노동자가 노동자의 눈으로 역사를 배우고 기억하지 못하면 역사를 지배하는 지배세력의 현실을 벗어날 수 없다. 노동자가 역사를 기억하고 배우는 일은 노동과 투쟁이 정당하고 인간다운 삶을 위한 것이고, 역사에 발맞추어 나가는 길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배우는 것이다. 또한 현실을 변혁할 연대의 감성을 계발하는 힘이기도 하다.

체게바라가 쿠바 혁명에 성공한 뒤 젊은 청년들에게 “지구상에 단 한 사람의 무고한 죽음에 대해서도 고통을 느낄 줄 아는 감성을 계발하고, 자유의 깃발 아래 떨쳐나설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하고 연설한 대목이 있다. 그러한 감성을 계발하는데 역사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자유의 깃발 아래 떨쳐나서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는 역사 변화 가능성을 통한 희망에서 나온다.

기억을 장악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역사의 진보는 있어야 할 것을 있게 만들고, 없어야 할 것을 없게 만드는 노동과 투쟁이라는 두 수레바퀴가 굴러가며 이루어졌다. 노동과 투쟁의 갈피마다 수많은 사람들의 고뇌와 고틍, 아픔과 슬픔이 담겨 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역사와 미래를 만들어 갔던 수많은 노동자 민중의 삶과 투쟁이 있었다.

역사가 역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역사는 역사를 아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것이지 역사 자체가 만드는 것은 아니다. 역사라는 지도와 나침반을 가지고 있어도 지도 위에는 칠흙 같은 밤이나 안개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한여름 폭우로 끊긴 다리나 폭설로 막힌 고개도 그려져 있지 않다. 앞으로 나가려면 구체적인 현실에서 판단하고 대응하면서 앞길을 찾아 나가야 한다. 그렇더라도 제대로 길을 찾아가려면 지도와 나침반을 버려서는 안 된다. 역사는 지금까지 걸어 온 길을 돌아보고 앞길을 찾아가는 데 필요한 지도와 나침반이 될 수 있다.

박준성 /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 필자가 앞으로 한달에 한번 씩 ‘함께가는 역사기행’이라는 꼭지의 역사칼럼을 새로 연재합니다. 윗 글은 필자가 앞으로 연재하는 칼럼글의 서문격으로 보내온 글입니다. 필자는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이야기』,『슬라이드 사진으로 보는 노동운동사』,『역사현장을 찾아서』(공저),『바로보는 우리역사』(공저) 등의 책을 썼으며 현재 역사학연구소 연구원, <역사와 산> 고문, 노동자교육센터 부대표, <작은책> 편집위원, 노동자 역사 <한내> 연구위원 등을 맡고 있습니다. /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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