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도에 폭탄이 터지면서 우리사회는 말 그대로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운 시계 제로의 상황에 잠시 놓이기도 하였다. 예로부터 위정자라고 일컫는 집단은 국가폭력의 결정판인 전쟁이라는 최고조의 위험상황을 모두가 회피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악용하여 국민들에게 공포정치를 하는 계기로 삼았다.

이런 과거의 경험을 새삼 떠올려주려는 듯이 전쟁위협이라는 국가폭력으로도 모자랐는지 내년 예산안 통과를 두고 국회라는 공적인 자리에서 벌어진 폭력행사가 난무하는 장면이 연출됐다.

게다가 현대건설 인수문제를 두고 현대그룹과 현대자동차가 같은 집안 내에서 골육상잔과 이전투구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공적인 절차와 과정이 깡그리 무시되면서 사사로운 개인감정과 이해관계가 앞서는 한국 사회의 씁쓸한 자화상은 깡패와 다를 바가 없는 한 재벌 2세가 화물연대 노동자에게 ‘맷값’이라는 이름까지 붙여가며 알루미늄 배트로 가한 폭행사건에 이르러선 마치 하나의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한 착시와 트라우마마저 들기도 한다.

두 가지의 폭력: 구조적 폭력과 사적인 폭력

지구 어디를 가더라도 사사로운 원한이나 이해관계 때문에 빚어지는 사적인 폭행인 테러와 린치는 국가라는 기구를 통하여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사적인 폭력행사를 합법으로 인정할 경우 국가가 존재해야 할 이유는 없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인 관습법만으로 사회가 유지되는 전근대적인 사회에서도 사적인 테러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금기적 행위로 여겨왔다. 그러나 이런 범죄행위가 버젓이 일어나는 현재의 한국사회를 두고 비정상의 사회라고 부르는 게 지극히도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사적인 폭력이 앞서기 때문에 비정상이라고 보기 보다는, 오히려 국가나 자본이 주도하는 구조적 폭력에는 너무나 둔감한 현실이 문제의 핵심이다. 서해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의 핵심내용인 NLL이라는 북방한계선이 언제 어떻게 만들어 진 것인지, 재벌 집안들끼리 서로 치고 받는 싸움보다는 자본이라는 일컬어지는 탐욕스러운 집단이 힘없는 노동자에게 가하는 구조적 폭력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너무나 둔감할 뿐이다.

▲ 40대 이후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힘으론 어쩔 수 없다는 무력감과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들게 만드는 것이 비정규 노동자문제다. 현대차비정규지회 가족대책위 소속 회원이 25일 간의 점거농성을 마치고 나온 남편을 만나 울음을 터트리고 있다. <노동과 세계>제공

연평도 사건이후 언론의 관심에서 멀어진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지회의 투쟁은 하나의 실례이다. 구조적 폭력이 가지고 있는 은폐와 위장술을 노동자들의 투쟁만으로 감히 깨뜨릴 수가 있을까라는 의문마저 들게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노동자들은 계란으로라도 바위를 깨어 보자는 무모(?)한 심정과 용기로 구조적 폭력에 대한 저항을 이어갔다.

비정규 노동자라는 낙인

비정규 노동자라고 하면 의례적으로 따라오는 말이 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한다거나 기술이나 기능, 지식이 부족하고 무능하기 때문에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젊은 작가인 김영하가 쓴 소설 『퀴즈쇼』의 한 대목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는 단군 이래 가장 많이 공부하고, 제일 똑똑하고, 외국어에도 능통하고, 첨단 전자제품도 레고 블록 만지듯 다루는 세대야. 안 그래? 거의 모두 대학을 나왔고, 토익점수는 세계 최고 수준이고, 자막 없이도 할리우드 액션영화 정도는 볼 수 있고, 타이핑도 분당 삼백 타는 우습고, 평균 신장도 크지. … 그런데 왜 지금 우리는 다 놀고 있는 거야? 왜 모두 실업자인 거야?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한 거지”

신세대의 발랄함과 유쾌함 마저 묻어 나오는 이런 항변 앞에서 40대 이후의 사람들은 미소 머금은 동의와 함께 자신의 힘으론 어쩔 수 없다는 무력감과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들게 만드는 것이 비정규 노동자문제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잡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던 정규직 좋은 일자리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합법적으로 열렸는데도 불구하고 거대 재벌사는 배째라는 식으로 버티는 지금의 모습을 두고 정상, 비정상 운운하는 것이 어쩌면 한가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오히려 분노조차 제대로 조직하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이 더욱 야속해 보인다.

어느 인터뷰에서 들었던 비정규 여성노동자의 말이 계속 머리를 맴돈다. 한 집안의 어머니이기도 한 그녀는 “휴식시간에 자기네들끼리 담배를 피면서 참 오글오글하게 모여 있을 적에, 그 상황이 마음 아프더라구요. 애들이 당당하지 못하고 앉아 노는 것도, 저 바깥에서 훤하게 노는 것도 아니고, 현장 구석에 쪼그려서 앉아가지고 담배를 피우고 커피마시면서 끼리끼리 놀지요”라고 말했지만, 이 서글픈 현실에 대한 푸념을 이제는 분노로 조직해 내는 용기와 지혜를 금속노조가 지니기를 소망해 본다.

이종래 / 한국노동운동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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