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소통 공간에 오랜만에 반가운 소식이 올라왔다. 11월 30일 “우리를 발목 잡아 파업을 계속하라”라는 제목으로 수원시민 단체 40개가 공동의 목소리로 <철도파업에 대한 수원시민대책회의 지지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한 지역에서 나온 목소리지만, 철도노동자들에게는 그래도 힘나는 소식이다. 철도노동자들의 투쟁이 정권의 정책을 비판하며 노동자 투쟁을 지지하는 ‘시민’의 목소리를 끌어낸 것이다. 나아가 시민들은 불편을 감수할 테니 믿고 파업하라고 한다. 승리할 때까지 파업을 하란다.

“......마지막으로 파업을 선택한 철도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에 바란다. 우리를 볼모로 파업을 지속하라. 사측과 정부의 가공할 탄압은 이미 예상했을 것이다. 시민의 불편, 우리는 감수하겠다. 지금의 불편은 미래의 안전과 직결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믿고 파업하라. 승리할 때까지 파업하라.” <철도파업에 대한 수원시민대책회의 지지 성명. 2009.11.30.>

▲ 19961230 노동법 개정 총파업 당시 명동성당 집회.

지난 시기에도 노동자들의 ‘투쟁’이 ‘국민’의 지지를 끌어낸 적이 있었다. 1996년 12월 26일부터 40여 일간 벌어졌던 민주노총의 1996~1997년 노동법 안기부법 반대 총파업투쟁이 그것이다.

"우리를 볼모로 파업 지속하라"

1996년 12월 26일, 김영삼 정권의 노동법과 안기부법의 날치기 통과에 항의하여, 민주노총은 즉각 총파업에 돌입하면서 시작됐다. 1996년 12월 26일에서부터 1997년 1월 말까지 파업 참가 누적규모가 3,206개 노조, 파업 참가 연인원이 359만7,011명에 이르는 한국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정치총파업이었다. 정권과 총자본에 대항하여 전국 노동자들이 투쟁을 벌인 것이며, 정권의 반민주적 작태에 분노한 국민의 지지를 끌어낸 것이다.

총파업이 가능했던 것은 ‘정리해고제’의 법제화 자체가 전체 노동자들을 단결시키는 조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1987년 이후 지속된 투쟁 경험, 그리고 민주노총과 대공장 노동조합이라는 주력부대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1997년 1월 18일, 민주노총 지도부가 ‘유연한 전술’이라는 명목으로 수요파업으로 전환한 이후, 투쟁의 주도권을 상실하면서 결국 3월 국회에서 노동악법 재개정이 통과됐다. 그 결과 투쟁은 패배했고 노동자들은 노동악법 개정의 주체가 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이 시기 민주노총 지도부는 ‘정치의 주체는 의회’라는 생각이 깔려있어 노동법 개정을 끝까지 총파업의 힘으로 저지한 것이 아니라 국회로 넘긴 것이었다. 또 총파업 과정에서 일부 공장에서는 “정치총파업은 정권과의 싸움이지, 단사 자본과의 싸움이 아니다”라는 이유를 들어 투쟁을 중단하기도 했다. 두 생각 모두 정치문제와 경제문제를 분리시켜 총파업투쟁의 성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탓이었다.

정치의 주체가 '의회'라는 잘못된 인식

또 다른 이유는 민주노총에 걸린 지나친 부담이었다. 날치기 개악 노동법 안기부법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의 관철이냐, 무력화냐’를 둘러싼 지배세력과 노동자 민중 사이에 물러설 수 없는 대립국면이 형성되었다. 정권과 자본의 공세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정치조직과 강력한 노동자 민중의 연대투쟁이 필요했다. 그러나 노동자의 정치조직은 없었고, 민중운동과 민주화세력은 민주노총 투쟁에 대한 지원과 지지 정도였지, 강력한 연대 공동투쟁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으로 민주노총은 ‘신자유주의 저지’라는 무거운 짐을 거의 혼자 짊어지고 가는 것이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 1997년 1월 울산 현대자동차 앞 노동법 개정 총파업 행진.

이러한 문제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96~97년 노동법개악 저지 총파업투쟁’의 의미는 컸다. 우선 총파업은 ‘노동악법 전면 무효화’라는 정치적 요구를 중심으로 전 노동자들-단사별, 지역별, 업종별, 산업별 이해를 일치시켜 ‘노동자는 하나’라는 일체감으로 단결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는 금속노동자를 중심으로 강고한 파업투쟁을 유지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지만, 거기에 사무전문직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나선 것도 중요한 힘이었다. 또한 총파업투쟁은 그 성격에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와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노동자들이 주도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에 맞서 전국 수준에서의 정치총파업을 전개한 것은 1980년대 이후 세계 노동운동의 역사상 유래가 없는 것이었다. 신자유주의 공세로 고통 받으면서 침묵했던 세계 노동자들을 고무시켰고,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선 세계 노동자들의 반 세계화투쟁에 하나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반세계화 기폭제

이러한 총파업투쟁은 이후 노동운동에 ‘신자유주의 분쇄, 산별노조 건설, 정치세력화’라는 과제를 제시하였다. 12년이 지난 현실 노동운동은 어느 지점에 서 있는 것일까.

1997년 경제위기 이후 불어 닥친 신자유주의 광풍에 따른 총자본의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 공세 앞에 고용불안 속에 노동자들은 ‘생존의 문제’를 여전히 사업장 수준에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노동자의 이해와 단결을 발전시키기 위한 산별조직건설은 조합원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활동하고 있는 것인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과제는 ‘정치’ 따로 ‘경제-현장’ 따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곧, 과거의 한계를 반복하고 성과를 무로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96~97년 노동법개악저지 총파업투쟁의 실패이유와 성과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 유경순(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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