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일 지부장님. 저는 한국노동운동연구소의 이종래입니다. 몇 달 전에 구미지부 교육하러 갔을 때 서로 눈인사만 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진 못했지만, 지부장님의 눈매는 여전히 눈에 밟힙니다. 제가 워낙 숫기가 부족한 인간이어서 그런지, 다정하게 말을 붙이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웬 뜬금없이 이렇게 편지를 쓰는지는 말 안 듣더라도 지부장님은 잘 아시겠지요. 속내를 잘 말하지 못하는 인간이 편지로나마 마음을 표현해야 될 것 같은 답답함 때문에, 결례를 무릅쓰고 깜깜한 밤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그냥 몇 자 적어봅니다.

노동운동의 과거와 현재

올해는 전태일 열사가 돌아가신지 40주년째입니다. 전태일 열사는 40년 전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는 외침을 남기면서 분신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셨지만, 그의 의로운 행동은 우리 노동운동과 영원히 함께하는 가치지향으로 승화하였습니다.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노동자들을 구하려던 전태일 열사의 몸부림은 우리 노동운동에 절대적인 가치로 자리 잡으면서, 활동가라면 당연히 요구되는 덕목이자 규범으로 여겨졌고, 이런 가치지향은 한국 노동운동에서는 하나의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현재의 노동운동에서 과거처럼 엄격하게 자기 수양하듯이 개인적인 욕심을 자제할 줄 아는 활동가가 과연 있기나 하냐는 사회적 비난과 조롱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대개 노동운동은 고사하고 노사관계조차 잘 모르는 사람들이 불쑥 튀어 나와 한 번씩 내지르는 헛소리라고 해야 맞겠지요. 왜냐구요? 40년 전의 전태일은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끔찍한 상황을 끝내려면 노사가 한 발씩 양보하는 게 도리 아니냐며 성인군자인 척하는 사람들은 너무 많지만, 이들은 노동현실에 대해 제대로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 동안 노동자와 노동조합이 얼마나 많은 양보를 했는지는 전혀 알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노사평화가 가장 좋은 가치라는 주문만 되뇌이는 이들은 정신적 금치산자와 다를 바가 없지요.

▲ 김준일 지부장
우리의 노동현실은 기업경영진이 금속노조 탈퇴를 실질적 명분으로 하면서 교섭에 나오지 않더라도 그들을 부당노동행위로 잡아가지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사용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막무가내로 억지와 트집을 일삼더라도, 노조가 할 수 있는 행동이란 엄청난 희생을 각오한 파업밖에 없는 게 또 다른 현실입니다. 그래서 파업을 하면 이젠 노조는 나쁜 짓만 골라서 하는 ‘문제아’라는 식의 딱지붙이기에 열중하지요. 게다가 노동자들 중에서 누군가 ‘우리가 금속노조에 가입하던 말든 너네가 뭔데 지랄하고 간섭하냐’고 고함이라도 치면,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납작 엎드려 있다가 나중에 핑계를 잡아 해고통지서로 응답하는 저들의 비겁함에 우리는 이미 익숙할 뿐입니다.

노동운동의 미래를 위한 몸부림

김준일 지부장님. 지부장님에게 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셨냐고 묻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요. 하지만 당신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굳이 눈으로 보지는 못했어도, 다른 노동자들의 가슴엔 이미 깊숙하게 파고드는 현실이 슬플 뿐입니다.

내전상황을 방불케 하는 우리의 노사관계에서 저들이 요구하는 금속노조 탈퇴는 궁극적으론 무(無)노조로 이어지고 현장의 노동자들은 이젠 울타리라곤 하나 없는 허허벌판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노동자의 운명이 안타까웠겠지요. 하나를 양보하면 나중엔 전부를 내놓으라는 호랑이 우화가 우리 노동자에겐 한낱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사실이라는 그 자체가 싫었겠지요. 어쩌면 노조 득을 볼 땐 무리 지워 몰려왔다가, 자기 배만 불리면 떠나버리는 몇몇 조합원들의 하이에나와 같은 행태가 지긋지긋하였겠지요. 노조간부 할 사람을 구하지 못해 쩔쩔매는 와중에, 노조를 무시하는 현장 동료들을 바라보면 말로 하기 어려운 환멸과 모욕감도 느꼈겠지요. 노조 일 때문에 가족에겐 항상 부족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밖에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려 애써 보지만, 그래도 마음 한켠에 남아있는 미안함에 고개 숙일 수밖에 없는 그 짠한 마음은 말 안 해도 모두에게 전해지고도 남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을 그렇게 만든 건 힘없는 우리 노동운동의 현실이 아니라, 노동자를 토끼몰이 하듯이 마구잡이로 몰아 부치는 공권력과 사용자들의 무모함이라는 사실에 기가 막힐 뿐입니다. 죽을 테면 죽어보라는 식으로 공갈을 치는 조폭들도 하지 못하는 일을 저들은 버젓이 저질러 놓고도 노동자들이 생떼를 쓴다고 또 말하겠지요.

김준일 지부장님. 당신의 행동은 노동현실에 대한 고발이자, 미래를 위한 몸부림입니다. 전쟁을 치루 듯이 해야 조금이라도 진전되는 단체교섭마저도 이젠 원천적으로 없애려는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소귀에 경 읽는 소리일 겁니다. 하지만 노동자들에게 민주주의는 아무도 이르지 못했기에 소중할 수밖에 없는 미래를 만드는 희망의 수단입니다. 노조활동마저 못하도록 만드는 게 얼마나 큰 잘못인지도 모르는 인간들에게 당신은 미래라는 곳을 손을 들어 가리켜 주었습니다.

김준일 지부장님, 이제는 훌훌 털고 일어나셔야지요. 노동운동의 미래를 만드는데 같이 힘을 모으고, 함께 하셔야 합니다. 지금까지 같이 해온 구미의 동지들에게 다시 돌아가는 날이 빨리 오길 바랍니다. 그리고 KEC 안팎에서 고생하는 동료들을 생각해서라도 당신은 반드시 하루빨리 일어나셔야 합니다.

2010년 11월 2일 한밤중에 이종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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