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사회적 책임’, 좋은 말이다. 국제적으로는 물론 지난 몇 년 전부터 한국사회에서도 적극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자본주의에서 여전히 이 말은 ‘빛 좋은 개살구’라는 게 내 생각이다. 많은 기업들이 벌이고 있는 ‘사회적 책임’ 활동들을 폄훼하려는 게 아니다. 이 말이 함축하고 있는 가치에 비춰볼 때, 한국사회에서 보이는 기업들의 행태는 매우 부자연스럽다는 점을 말하고자 함이다.

주식회사가 운영되는 원리에까지 ‘사회적 책임’이 투영되지 않는 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브랜드 관리전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기업은 양질의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고, 이를 통해 일자리를 유지하고 창출하는 것을 통해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태도가 있을 수 있다. 필자가 알기로, 재벌총수를 비롯해 대부분의 최고경영진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최소주의적 견해, 또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시장주의적 견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태도에서는 굳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브랜드 관리전략 차원에서 이뤄지는 부가적인 활동이 되지 않으려면 그 고유한 내용이 확보될 필요성이 있다.

영국 제국주의가 식민지 수탈을 쉽게 하기 허용한 ‘동인도 회사’는 최초의 주식회사에 해당한다. 주식회사의 핵심 원리는 ‘유한책임’이다. 자신이 주식을 소유한 기업이 1조원의 부채를 안고 망해도, 자신이 소유한 주식이 100만원이면 딱 이것만 손해 보면 된다는 게 이 원리다. 기업의 위험을 부담하되, 소유한 만큼만 위험을 진다는 얘기다. 이런 유한책임 원리 때문에 대규모 자본 동원이 가능했다는 이유로, 주식회사는 흔히들 ‘자본주의의 꽃’으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주식회사는 애초 특혜였다. 기업 소유자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는 제도였다. 기업의 이익이 나면 배당이라는 이름으로 가져가면서도, 기업이 사회에 막대한 손해를 끼쳤을 경우엔 자기 주식 가치만큼만 책임을 지고 ‘나 몰라라’ 하면 그만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엄청난 특혜에 해당하는 주식회사를 허용하는 데 영국 제국주의는 매우 신중했다.

▲ 2007년 12월7일 삼성중공업 태안반도 기름유출 사건 때 해변에서 기름을 뒤집어 쓰고 죽어가는 뿔논병아리.

 2007년 12월7일 태안반도 기름유출 사건이 있었다. 이로 인한 환경과 지역사회에 대한 피해는 수천억원대에 이르렀다. 다행스럽게도, 수많은 자원활동에 힘입어 지금은 상당 부분 아물었다. 복구에 든 노력을 비용을 환산하면 수조원대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이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은 삼성중공업이었다. 삼성중공업은 임직원들은 날마다 복구사업에 투입하고, 1천억원 가량을 복구 사업에 투입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소송이 걸리자 책임질 수 있는 최대피해액은 50억원뿐이라는 자기책임제한 신청을 법원에 지난해 12월 제출하기도 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보험회사들의 구상권 행사로 기업이 파산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겨우 50억원만 책임지려 한다는 사회적 비판이 따랐음은 물론이다. 태안반도 주민 5392명은 삼성중공업 등 가해자를 상대로 1인당 20만원씩 총 10여억원의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여전히 끝나지 않은 아픈 기억을 새삼 들추는 이유는, 이 사건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어떤 관계에 있어야 하느냐 하는 점을 따져보기 위해서다. 태안반도 기름유출 사건의 피해를 고스란히 감당하고자 할 경우, 삼성중공업은 망할 수 있다. 그렇다고 삼성중공업이 사건 과정에서 보여준 태도는 ‘사회적 책임’의 가치의 핵심과는 거리가 멀다.

사회에 엄청난 피해를 발생시킨 삼성중공업이 보여야 할 일차적인 태도는, 주식회사의 유한책임 원리를 일단 정지시키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주주총회를 열어, 향후 2년이든 3년이든 주주 배당을 동결하고, 사회적 피해를 복구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겠다는 공개선언을 하는 것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삼성중공업 임직원들이 복구현장에 날마다 투입되는 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때늦은 ‘주주 자본주의’ 이론이 한국사회를 풍미하고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기업의 주인은 주주다. 경영진은 주주에 충실해야 할 의무를 진다. 그러나 주주는 사회에 끼친 엄청난 피해에 대해 유한책임을 지게 돼 있다. 경영진은 주주의 뜻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

이런 딜레마를 해결하는 것은, 주주들이 엄청난 사회적 피해 앞에 자신들의 배당권을 일정 기간 동안 동결시키는 것밖에는 없다. 하지만 이것은 이뤄지지 않은 채 해당 기업 임직원 급여 동결과 삭감 등이 먼저 거론되는 게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삼성중공업의 최대주주는 삼성전자(17.61%)이고, 그 계열사인 삼성생명 3.54%, 삼성전기 2.38%, 제일모직 0.42%, 삼성엔지니어링 0.13%, 제일기획 0.13%, 삼성에버랜드 0.13%, 삼성테크윈이 0.07% 등이 주요 주주를 이룬다. 이들 기업은 과연 삼성중공업으로부터 당분간 배당받지 않겠다는 방안을 검토라도 했을까? 삼성의 이씨 총수일가는 이런 방안을 머릿속에 떠올리기라도 했을까?

주식회사는 특혜였다는 역사적 진실은 지금도 되풀이되는 현실임을 부정하지 않은 것,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브랜드 관리전략을 넘어서는 굳건한 토대는 바로 여기가 아닐까 싶다. 이를 되새김질 해줄 수 있는 언론이 여럿이 있지 않는 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변죽을 울리는 데 그치기 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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