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이후 한국사회는 누구나 알고 있듯이 비정규직노동자들이 늘어났고, 이들은 생존권 확보와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전선의 중심에 서 있다. 투쟁을 경험하면서 상당수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내가 좀 더 많이 배웠더라면”, “사회에 대해 좀 더 알고 있었더라면” 자신의 권리에 대해 보다 분명하게 주장하고 좀 더 잘 싸울 텐데 하는 말들을 하기도 한다. 아니 대부분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짧은 가방끈 때문에 사회생활에서 제한 당하며 노동현장에서 무시당하고 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노동자들은 배움에 대한 욕구가 참 많다.

지금은 노동조합 차원에서 조합원들의 교육이 체계적으로 진행되기도 하고, 전문 노동자교육기관도 있지만, 이런 교육이 나이 많거나 아직 젊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거리가 먼 이야기인 것 같다. 지난 노동운동사에 노조에서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과 배움에 대한 요구를 해소시켜주기 위한 노동자 교육활동을 모범적으로 실천한 경우가 있다. 그것은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상징인 청계피복 노동조합의 ‘노동교실’ 활동이다.

청계 노동자들의 배움터이자 해방 터, 노동교실

노동교실은 어떤 곳이었을까. 노동교실은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의 배움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곳이고 노동자 권리의식을 배우는 장소였다. 1970년대 청계천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중 80% 이상이 여성이었고, 그 중에서 절반 이상이 12~16세의 어린 나이였다. 이들 여성노동자들은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남자형제들의 학비를 대기 위해, 또는 집안 살림에 보태기 위해, 심지어는 밥그릇하나 덜기 위해 초등학교도 채 졸업하지 못하고 청계천으로 보내졌다. 이들은 하루에 12~16시간씩 일하면서 햇볕조차 제대로 쐬지 못해 누렇게 뜬 얼굴로 이름도 없이 ‘1번시다’, ‘7번 미싱사’로 불리면서 인간으로 대우 받지 못하면서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을 더 힘들게 한 것은 ‘배움에 대한 고픔’이었다. 청계 노동자들의 평균 학력이 초등학교 중퇴라는 것은 이들이 사회생활에 필요한 한글을 깨우칠 수 있는 기초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박탈당하면서, 얼마나 배움에 대해 목말라 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런 노동자들의 현실과 욕구를 파악한 청계노조는 1973년 상가대표들이 돈을 모아 만든 ‘새마을 노동교실’을 투쟁으로 확보하여 노동자들의 교육공간으로 만들었다. 노동교실에서는 중학교 과정을 공부하는 중등교실, 기술을 배우는 기술교육반, 그리고 노동자권리를 배우는 노동상식 교육 등을 진행했다. 노동교실은 이런 교육프로그램 이외에도 다양한 소모임을 운영해서 노동자들의 만남과 소통의 공간 역할을 했다. 밤마다 노동교실은 노동자들이 북적거렸고, 이 방 저 방에서 노동자들이 벌이는 토론으로 시끌벅적했다.

▲ '노동교실'은 청계 노동자들의 배움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곳이고 노동자 권리의식을 배우는 장소였다.

이런 노동교실 활동 결과 노동조합은 많은 조합원을 확보하여 조직적 힘을 키울 수 있었다. 전태일 열사 분신의 힘으로 세워진 청계노조에 대해 사업주들은 ‘빨갱이들’, ‘돈을 띠어먹는 집단’, ‘깡패집단’ 등 온갖 악선전으로 많은 노동자들이 노조에 대한 좋지 않은 선입관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교실에서 노동조합을 알게 된 많은 노동자들이 노조에 참여하였고, 이들 중에 열성적인 이들은 노조간부로 활동하기도 했다. 노동교실은 간부를 배출하는 역할도 톡톡히 했던 것이다.

노동교실이 청계노동자들의 공간으로 자리 잡아가자, 주위의 민주노조간부들이나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던 지식인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사업장을 뛰어넘는 소통과 연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실제 노조간부들 간의 노동교실을 통한 소통은 청소를 하던 노동자가 유해물질 때문에 죽음을 당한 1977년 민종진 질식사 사건이 일어나자 이에 항의하는 민주노조들의 연대투쟁을 벌일 수 있는 바탕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노동교실은 노동자들의 배움과 모임의 공간이자 소통과 연대의 공간으로 자리 잡아갔다.

1977년 9월 9일 노동교실 되찾기 투쟁

노동교실 활동이 청계노조 안팎으로 널리 알려지자, 그렇지 않아도 전태일 열사 분신이후 청계노조를 불안하게 여기며 항상 감시하던 정권은 노동교실을 위태로운 존재로 주목했다. 결국 1970년대 후반 정권유지에 불안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사회운동 전반을 탄압하면서 성장하고 있는 민주노조운동에도 탄압을 가했다. 그 1차 대상이 민주노조운동의 상징적 존재인 청계피복노조였다. 정권은 9월 3일 노동교실 실장인 이소선 어머니를 구속하고 노동교실을 폐쇄하였다.

청계노조의 정신적 지주인 이소선 어머니의 구속과 노동자들의 ‘배움의 공간’이자 ‘소통의 장’인 노동교실을 빼앗긴 것에 대해 분노한 일부 노조간부들이 정권의 탄압에 맞서 저항에 나섰다. 노동교실 폐쇄에 대한 결사항전을 준비한 것이다.

이들은 우선 9월 8일 ‘결사선언’이란 제목의 선전물을 시장상가 일대에 뿌렸다. 다음날인 9월 9일 오후 2시 전경들이 지키고 있는 노동교실 주위에 노동자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더니, 50여 명의 노동자들이 경찰을 밀치고 노동교실로 들어가 농성투쟁을 시작했다. 이들은 ‘어머니 즉각 석방, 폭력경찰 처단, 노동운동 탄압중지와 노동3권 반환‘ 등을 요구했다.

노동자들과 경찰 사이에 격투가 벌어졌다. 노동교실 3~4층을 점거한 노동자들은 거울, 형광등 등을 깨뜨려 유리조각, 몽둥이를 집어 들었으며 경찰의 진입을 막으려고 바리게이트를 치고 농성을 했다. 그러나 경찰이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노동교실에 진입하자 분노한 노동자들은 한쪽에서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였고, 다른 한쪽에서는 배를 가르고 자해를 하기도 했다. 17살의 한 여성노동자는 “제2의 전태일은 여자가 되어야 한다”며 창밖으로 투신하려했다. 노동자들이 극한투쟁을 벌이자 경찰은 무력진압을 보류하고 요구를 들어주겠다며 회유했다. 밤 10시까지 계속된 농성으로 자해한 노동자들의 생명이 위태로워지자 노조 지부장이 나서서 경찰과 협상을 하고 노동자들은 농성을 풀었다.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반공법’으로 끌려가던 엄혹한 유신정권 시기에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노동자들은 민주노조활동을 탄압하는 정권에 죽음을 불사하며 투쟁을 벌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지금 노동자들의 해방구는

비록 일부 노조간부와 중견 조합원들이 주도한 투쟁이었지만, 탄압에 곧 바로 목숨까지 거는 격렬한 투쟁을 벌인 것은 바로 노동교실이 노동자들에게 소중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노동교실은 배움과 소통의 공간에서 나아가 노동자들이 태어나 처음으로 하나의 인격체로서, 그리고 노동자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깨달아 갔던 유일한 ‘해방의 공간’이었다.

▲ 노동교실은 노동자들의 배움의 공간이자 소통과 연대의 공간이었다. 노동자들이 태어나 처음으로 하나의 인격체로서, 그리고 노동자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깨달아 갔던 유일한 '해방의 공간'이었다.

지금의 노동운동은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했으나, 오늘날 노동자들도 자신들의 ‘소통’과 ‘해방’의 공간을 가지고 있을까? 아니 그런 공간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서로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면서 소통의 기쁨과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자본과 정권과의 긴 투쟁에서 ‘해방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노동해방 세상을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만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싶다.

유경순 /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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