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노래 꽃다지’는 최근 노동자 집회에서 쉬 볼 수 없지만 90년대에는 연 200회 지방 공연, 공연마다 2~3천 명이 몰려드는 인기 노래패였다. 당시만 해도 가수만 20여명인 대규모 노래패였지만 현재는 가수 이태수·조성일과 정혜윤․홍소영 등 남자 두 명, 여자 두 명의 4인조 가수가 꽃다지에서 노래하고 있다.

전성기. 그 행복한 순간

“지역에서 한 해 사업의 결실을 보는 자리, 꽃다지 공연을 보러가자며 일꾼을 조직화하는 자리로 우리를 섭외했어요. 그래서 항상 2~3천명씩 우리 공연을 보려왔죠”
꽃다지의 전성기를 설명하는 민정연 대표의 눈이 빛난다. 단순한 노래 공연이 아니라 운동을 함께 만드는 동지로 여겨진다는 것은 행복한 순간일 수밖에 없다.

▲ 민정연 '희망의 노래 꽃다지' 대표.
“제가 처음 기획자로 활동했을 때가 94년인데, 당시엔 공연이 끝나면 팬(?)들이 몰려와 싸인을 받았어요. 심지어 가수들이 싸인하느라 바쁘자 기획자인 저한테까지 와서 티셔츠를 내밀며 싸인을 해달라는 거에요. ‘민중가요도 팬 문화가 있구나’하고 충격을 받았죠”

“어느 날은 거리공연을 하는데 대학생들이 몰려왔어요. 알고 보니 교수가 꽃다지 공연을 보고 보고서를 써오라는 숙제를 내줬대요. 노동역사를 배우는 수업이었는데 꽃다지의 공연을 통해 알아보라는 거죠. 그만큼 대중적이었다고 생각해요”

민대표는 10여 전 일을 어제 일어난 일처럼 묘사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꽃다지가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은 90년대가 진보적 활동이 활발하고 노동문화 역시 전성기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독재정권도 건드릴 수 없었다

꽃다지는 94년 노동가요 중 처음으로 합법음반을 발표한 역사적인 노래패다.
1992년 노동자 노래단과 삶의 노래 예울림이 통합해 ‘희망의 노래 꽃다지’를 창단하고 난 후 ‘노/동/자’ 세글자를 넣고 합법음반을 내는데 힘썼다. ‘근로자’가 아닌 노동자들이 부르는 우리의 노래가 합법적으로 불려지는 게 당연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94년 ‘희망의 노래’라는 최초 합법 앨범을 내는데 성공했다.
“‘단결투쟁가’와 ‘파업가’ 등은 창단 전 노래단들이 이미 부르던 노래였어요. 이미 수십만이 부르고 있는 노래 가사를 바꾸라는 게 말이 되냐고 심의위원회에 따져 물으니 어쩔 수 없이 봐준다는 식으로 통과시켜주더라고요”
대중의 힘과 꽃다지의 위력이 결합된 거대한 힘을 독재정권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미안해요. 잊고 있었어요”

지난달 13일 꽃다지는 여름 콘서트를 열었다. 그리고 ‘나에게 꽃다지란’이라는 주제로 이벤트를 진행했다. 이벤트에 공모한 많은 사람들이 40대 전 후반. 90년대 초중반에 대학생이었던 이들은 꽃다지에게 “미안해요. 잊고 있었어요”, “고마워요. 살아있어줘서”라는 말을 남겼다. “가장 열정적으로 꿈을 쫒던 그 나이에 꽃다지가 함께 했어요. 그래서 어쩜 그 말은 자신의 꿈에게 한 말일지도 몰라요” 삶에 바빠 잠시 비켜놨던 열정과 꿈을 ‘꽃/다/지’ 세글자와 함께 끄집어 낸 사람들.
꽃다지는 활동가들에게 가슴 두근거리는 연예인이자 함께하는 동지, 젊음을 함께 그리던 친구, 그리고 시대를 노래하는 대표적인 노래패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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